31세에 대우실업 창업, 30년만에 재계 2위로 키워…외환위기 직후 해체
장기 해외도피 중 ‘제2의 고향’ 베트남에서 청년사업가 양성 주력

▲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사진은 지난 2017년 3월 22일 서울 힐튼 호텔에서 열린 대우그룹 창업 50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인사말을 마친 뒤 연단에서 내려오는 김 전 회장 모습. 2019.12.10 [연합뉴스 자료사진]
▲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사진은 지난 2017년 3월 22일 서울 힐튼 호텔에서 열린 대우그룹 창업 50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인사말을 마친 뒤 연단에서 내려오는 김 전 회장 모습. 2019.12.10 [연합뉴스 자료사진]

9일 향년 83세로 별세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재계 2위 그룹의 총수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부도를 내고 해외도피 생활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보냈다.

삼성과 현대를 키운 이병철과 정주영 등 1세대 창업가와 달리 김우중 전 회장은 샐러리맨으로 출발한 1.5세대 창업가로 분류된다.

김 전 회장의 ‘세계경영’의 성공신화는 만 30세 때인 1967년부터 싹을 틔웠다.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에 근무하던 ‘청년 김우중’은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자본금 500만원으로 출범한 대우실업은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수출해 58만 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린 데 이어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뒀다.

트리코트 원단과 와이셔츠 수출로 대우그룹 축성의 종잣돈을 마련한 고인에게는 ‘트리코트 김’이라는 별칭이 따라붙기도 했다.

또한, 직접 샘플 원단을 들고 대우의 첫 브랜드인 영타이거를 알렸던 고인은 동남아에서 ‘타이거 킴’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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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급성장 가도를 달렸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호주 시드니)를 세웠고, 1975년 한국의 종합상사 시대를 연 이후 김회장이 이끈 대우는 국내 중소기업의 수출창구가 됐다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이어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고, 1974년 인수한 대우전자와 1983년 대한전선[001440]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으로 성장시켰다.

대우그룹은 또 에콰도르(1976년)에 이어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통해 해외사업의 터를 닦았다.

김 전 회장의 거침없는 확장 경영의 결과 창업 15년만에 대우는 자산 규모 국내 4대 재벌로 성장했다.

해외영업에서 남다른 수완을 발휘한 김 전 회장은 ‘박정희 정권’에서 가장 두드러진 기업인으로 주목받았다. 박 전 대통령이 김 전 회장의 부친이 대구사범 은사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절친한 사이가 된 것으로 재계에서는 전해진다.

김 전 회장은 1980∼90년대에도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강조한 대로 ‘세계경영’에 매진했다.

특히 1990년대 동유럽의 몰락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경영을 본격화했다.

이에 따라 대우는 1998년말에는 396개 현지법인을 포함해 해외 네트워크가 모두 589곳에 달했고 해외고용 인력은 15만2천명을 기록했다. 당시 고인은 연간 해외 체류기간이 280일을 넘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1997년 11월 닥친 외환위기는 세계경영 신화의 몰락을 불러왔다.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갈등과 마찰을 빚으면서 붕괴가 빨라졌다. 특히 19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은 김 전 회장은 ‘수출론’을 집중 부각했지만, 관료들과 갈등은 여전했고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맞았다.

1998년 당시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핵심사안으로 꼽혔던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렸고,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한도 제한 조치에 이어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당시 일본계 증권사의 ‘대우그룹의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가 나온 것을 계기로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그룹은 끝내 해체됐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6월과 벌금 1천만원, 추징금 17조9천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말년에 ‘제2의 고향’ 베트남 등을 오가며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 프로그램에 주력하며 명예회복에 나섰다.

고인은 2014년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집필한 대화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통해 대우그룹의 해체는 경제관료들의 정치적 판단 오류 때문이라는 ‘기획 해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고인은 17조원에 이르는 미납 추징금과 세금을 내지 못하고 1년여 투병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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