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삶의 여백을 응시하는 찰나의 여유

이상향의 화가,이광택 작가의 그림과 글을 싣는다.그는 때로는 숨막힐 듯한 몽롱함으로,그리고 때로는 현실을 관조하는 넉넉함으로 고향의 자연을 담아내고 있다.특히 깊은 사유에서 비롯된 화가 이광택의 그림과 글은 다변화되는 복잡한 시대에 신선한 청량감을 던져주고 있다.이광택 화가의 그림 에세이를 격주로 싣는다.

노오란 기운이
채도 떨어진 보라색 사이에서
가늘게 진저리치는
노을도 사라지면
사위가 어웅해지면서,
그 노을자리 위로
절편 닮은 반달이 도동실
떠오르고
논틀밭틀 사이로 차락차락
달빛을 뿌릴 것이다.


1. 진달래귀갓길

흐벅지고 푸짐한 봄의 저물녘이다.햇살이 남아돌더니 그예 봄기운이 산의 자드락을 진달래 꽃밭으로 물들였다.성관(盛觀)이다.역시 봄은 꽃이 피어야 성스럽고 위대하다.두 눈을 거늑하게 채우는 저 진달래의 꽃잔치를 보자니,세상의 생명 하나하나를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너그러움이 생기고 삶의 여백을 오래 가만히 응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듯하다.어슬막이 머지않았다.노오란 기운이 채도 떨어진 보라색 사이에서 가늘게 진저리치는 노을도 사라지면 사위가 어웅해지면서,그 노을자리 위로 절편 닮은 반달이 도동실 떠오르고 논틀밭틀 사이로 차락차락 달빛을 뿌릴 것이다.순간 소박하고 정겹고 부드러운 산 능선의 선(線)이 우리 한국의 미(美)의 선을 닮았다고 생각한다.모자란 듯 하면서도 꽉 차고,억센 듯 누긋한 그 선의 아름다움을.

그림의 분위기가 그래서일까.집으로 향하는 아빠의 눈빛이 유난히 따뜻한 것 같다.얼룩 없이 착한 마음으로 살아와서 마음이 자작나무 속껍질처럼 하얄 것인데,얼굴을 들여다보면 보랏빛 생기로 물들어 있어 봄바람 같은 생채를 띠고 있을 것 같다.어디에선가 쪼르륵 쪽쪽 산새들도 반기는 듯하다.

저 멀리 집 앞에서 아내가 남편을 맞이하고 있다.의연한 아름다움이 곱게 몸에 밴 여인인데 눈길 또한 오렌지처럼 향기롭고 방의 아랫목처럼 따스할 것 같다.양지꽃처럼 사블사블 웃기 좋아하는 딸아이와 강아지는 벌써 한달음에 마중을 나왔고.하늘의 별밭이 온통 집 안으로 들어오는 늦은 밤까지 가족 모두는 진달래의 애환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보듬어줄 것이다.감미로운 바람이 정갈하게 비질하는 봄밤,나이답지 않게 올된 꼬마도 연분홍 빛깔로 채색된 꿈의 허방다리를 짚을 것이다.산자락에 그득 핀 진달래 꽃숭어리들의 곡선이 여린 율동으로 흔들리고 파란 밤의 기운은 바다풀처럼 부드럽게 흐르며 2분 쉼표로 율동하는 바람조차 고운 쪽빛으로 물들일 것이다.

역시나 “가장 훌륭한 글은 사랑할 때 나온다”고 말한 헤밍웨이의 말뜻에 수긍이 간다.사랑이란 숙주를 넣으면 세상은 어린 아이들이 좋아하는 솜사탕처럼 크고 탐스럽게 속속들이 부푼다.모든 사물은 내가 사랑하면 숨을 쉬는 법이다.‘마음이 팔자’라고 하지 않던가.그림 그리기도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깊고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세상에 못 다다를 곳이 없는 것이니,예술 하는 이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이 바로 마음 바탕이 아닐까 싶다.‘회사후소(繪事後素)’라고,그림 그리는 사람 역시 마음이 깨끗해야 하는 것이다.이 그림을 그리는 두 달 내내 나도 편안하게 연인을 바라보는 마음으로,사과꽃 위에 하얗게 쏟아지는 달빛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붓을 들곤 했다.볏짚단 쌓아놓은 들판을 바라볼 때 느끼는 따스하고 푸근한 위안을 화면에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일까.이 작품은 작년 가을,대전에서 개인전을 오픈한 바로 그 날 판매가 되었다.어떤 이가 구입했을까.워낙 큰 작품이라 가격도 만만찮았는데…어쨌건 그림을 그리던 당시의 내 심경을 제대로 읽은,눈 밝은 이였을 거라고 생각한다.그리자마자(전시 직전에 완성했음) 팔려버려 한편 아쉽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의 작품을 보면서 플루트 선율이 잔잔히 흐르는 듯한 행복을 느끼면 좋겠다.그리고 거칠고 팍팍한 삶 속에서 웃음이 홍수처럼 넘치면 좋겠다.

한 장의 그림 속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일.그건 정말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 일인가!

▲ 이광택 화가

춘천 출신으로 춘천고·서울대 미술대 회화과·중국 사천미술학원 유화과 대학원을 졸업했다.‘조화석습’,‘그리운 자연 그리운 사람 그리운 삶’,‘김유정 전’ 등 34번의 개인전을 가졌고 한국현대미술제을 비롯한 다수의 단체전에 참가했다.대표작으로 ‘자연에 깃든 삶’,‘봄날 오후의 산골’,‘달빛 가득한 산골집’ 등이 있으며 저서 ‘내 마음 속 이상향’을 펴냈다.2003년 강원미술상을 수상했다.산수화의 전통을 현대에 맞게 계승하는 작업을 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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