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두근 춘천소년원 교사
▲ 안두근 춘천소년원 교사
초등학교,아니 정확하게는 국민학교 4학년 때였다.별로 즐겁지 않은 미술시간에 조별 과제가 주어졌다.과제는 큰 스티로폼 위에 운동장 풍경을 꾸미는 공동 작업이었고,재료는 조원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나는 그 조의 조장이었다.살기 바빴던 80년대 초반,부모님의 관심은 아이들보다 일터로 향해 있었고,치열했던 삶 속에서 재료 준비는 결코 쉽지 않았다.결국 우리는 300원씩 모으기로 결정했으나 한명의 친구가 이렇다 할 이유 없이 돈을 내지 않았다.

지금도 선명한 37년전 친구의 얼굴은 늘 어두웠고 옷차림도 그리 깔끔하지 못했다.점심시간 늘 혼자 밥을 먹었고 무언가 부끄러운 듯 도시락 뚜껑을 열지 않았다.우리 집에서 불과 몇백미터 거리였던 친구의 집은 움푹 들어간 곳에 있어 매우 좁고 낡았으며,햇볕도 잘 들지 않았다.조장이라는 허울좋은 직함 아래 기세 좋게 돈을 받으러 간 날,친구는 아무 말 없이 방문을 닫았다.

결국 친구는 미술시간에 설 자리를 잃었다.힘 있는 친구에게 온갖 모욕과 수모를 당했고,아무 말 없이 왕따가 됐다.누구에게는 마치 백년과도 같았을 80분의 미술시간은 그렇게 지나갔고 세월이 흘러 우리는 고3이 됐다.공부에 별 소질이 없던 나는 어쭙잖은 지방대라도 진학하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리고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얼굴 보기 힘들었던 친구를 오랜만에 버스정류장에서 만났다.제법 늦은 시간이었다.‘어디 갔다오냐’는 질문에 작은 손가방 하나를 들고 걸어오던 친구는 무척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그것이 친구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대학 생활은 즐거웠다.자유로움에 취해 무분별한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날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던 친구의 죽음을 전해들었다.‘교회 수련회 갔다가 그만’,‘대학도 포기하고 취업 때문에 학원 다니고 그랬는데…’ 그 말이 전부였다.비로소 친구가 들고있던 작은 손가방과 어색한 미소의 의미를 알았고,가난을 극복하려고 힘겹게 몸부림쳤던 고단함을 가슴깊이 느낄 수 있었다.

아침 등굣길,멍 자국과 얼굴 상처를 보이면서 ‘선배한테 맞았어’ 자랑하듯 얘기하는 친구들이 멋있었던 철부지 어린 시절을 뒤로 한 채 세월은 흘러 오늘에 닿았다.19살 기억에 멈춰버린 친구의 죽음은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그가 내게 보여준 침묵은 어쩌면 배려와 이해를 바라는 간절함의 또 다른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목이 메인다.11살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두 손을 뻗어 그를 살포시 감싸 안아주고 싶다.

지난 설 고향을 찾아 언제 없어졌는지 모를 친구 집 앞에서 한참 그를 회상했다.금방이라도 방문을 열고 환하게 웃음지을 것 같은 친구,아마도 나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됐을 그를 목청껏 불러보며 비겁했던 유년시절의 가슴아픈 기억을 끄집어낸다.

거센 바람을 맞으며 길게 뻗은 해안가 방파제를 따라 계속 걸었다.방파제를 때리는 파도는 거칠고 높았다.바다에서 나고 바다를 보며 자란 나의 친구들은 파도를 닮았다.내가 20년째 둥지를 틀고 있는 춘천소년원 100여명의 아이들도 파도를 닮았다.

오늘도 변함없는 일상을 보내는 춘천소년원의 아이들도 저마다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검정고시에 꼭 합격해서 원하는 대학에 가겠다’,‘미용기능사 자격증을 따면 제일 먼저 아버지 머리부터 손질해 드리겠다’.어제보다 다른 오늘,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아이들,세상에서 가장 소박하고 따뜻한 꿈을 꾸는 아이들의 의지가 더욱 강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그 아이들에게 한 줄의 지식,한 개의 자격증보다는 내가 끄집어 낸 가슴아픈 기억과 그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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