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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주의 폐교 이야기] 1. 강릉 제비초교

동네사람 손 빌려 지은 학교, 운동장 곳곳 아이들 손때만
미술인촌으로 바뀐 마을학교
1949년 제비분교장으로 설립
전교생 300명 넘었을때도 있어
체육대회·행사 학교서 열려
어린이·어른들로 운동장 북적
선생-학부모 어울려 지내며
모내기·장작 준비 함께 해
학생 떠나고 미술인촌 탈바꿈
교실 내부 예술품으로 가득

김여진 beatle@kado.net 2020년 02월 15일 토요일 7 면
아이들이 줄어들면서 마을잔치가 벌어지던 학교 운동장은 어느 새 텅 비어가고,푸르렀던 교정에는 잡초만 무성합니다.강원도에 점점 늘어가는 폐교…하지만 그 속에 담긴 추억은 여전히 빛나고,문화공간으로 새 단장하는 곳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지난 2017년부터 3년간 도내 폐교 120여곳을 직접 찾아 숨겨진 이야기를 모아온 이학주 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장이 강원도 폐교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빈 그네와 칠 벗겨진 소녀상,흑백사진 속에 추억과 희망을 덧입혀 봅니다.

제비초등학교는 왠지 이름이 참 아름답다고 여겨졌다. 봄날을 알리는 전령사 제비는 강남을 갔다가 온다고 한다.삼월삼짇날이 되면 은근히 기다려지던 새였다.유독 사람과 가까이 해 <흥부전>의 주요 제재로 쓰이기도 했다. 처마 안에 집을 지어 사람의 보호를 받는 제비…제비초교라는 이름을 처음 듣고는 생각 난 제비의 모습이다.

마을의 어느 집 형국이 제비집 형국이라고 했다.보지 않아도 그 형상을 알 것 같다. 동그랗게 사방에서 감싸주며 포근한 인상을 주는 집이리라.그 집 때문에 마을 이름이 제비리가 되었고, 그 제비리에 지어진 학교가 제비초등학교다.

상당한 희망과 기대와 설렘으로 학교를 찾았다. 그러나 학교는 낡은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누군가 살고 있는 느낌은 들었지만,활기찬 학생들의 움직임을 볼 수 없는 그야말로 폐교였다. 마당에는 갖가지 조각품들이 이리저리 세워져 있었다.조각품들마저 녹슬어 낡아 있었다. 좌측에는 제비리 미술인촌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보이고,학교 정중앙에도 그 글씨가 꽃 그림과 함께 금색으로 써 있었다. 학교는 노란색으로 페인트칠이 칠해져 있다.한 눈에 봐도 어떻게 학교가 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흩어지고 정돈된 모습의 예술품들이 있었다.그 곳에서 조각을 하는 예술가를 만났다. 예술가는 건물만 옛 제비초교일 뿐이라고 애써 힘주어 말했다.교실 안은 조각가의 예술품이 가득 차 있어 활기가 넘쳤다. 칠판도 있고,난로도 있었다. 게시판에는 조각가의 일상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 학교 교정의 독서상.
▲ 학교 교정의 독서상.
운동장으로 다시 나왔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독서상이 하얀 회칠을 벗겨낸 채 이곳은 옛날 초등학교였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운동장 끝자락의 기린을 비롯한 여러 개의 짐승상도 독서상과 같이 초등학교의 흔적을 보여줬다. 참 많은 학생들이 뛰놀던 곳,마을사람 모두의 생각 중심에 놓여 있던 학교였다.

학교를 나와 사람들을 찾았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한참 기다린 후 골목길을 걸어오는 어떤 부녀를 만날 수 있었다.이곳에 온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었다.또 길을 걸어 큰길가로 갔다.그곳에도 산책을 나온 부녀가 있었다.제보자를 안내해 줬다.이 동네에서 아주 오래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이 학교 8회 졸업생 김 모(70) 씨. 강릉사투리를 아주 많이 쓰는 70세의 청년이었다. 청년이라 표현한 것은 그만큼 그의 말씀이 씩씩하고 시원했기 때문이다.사진들을 보자고 했더니 언젠가 1회 졸업생들이 자료를 만든다고 가져갔는데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다.학교가 폐교되어 많이 섭섭하다고 몇 번이고 얘기했다.

제비초교는 1949년 구정공립국민학교 제비분교장으로, 1952년 제비국민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그 해 제비국민학교가 됐다.이후 1999년 3월 명주초등학교로 통폐합됐다.그러고 보니 50여년을 제비리 마을사람들과 함께 했다.학생 수가 많을 때는 한 반에 70여명이었고,전 학년이 30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 모교를 배경으로 사진찍은 제비초교 졸업생들.
▲ 모교를 배경으로 사진찍은 제비초교 졸업생들.
김 씨에 의하면 제비초교는 3번이나 신축됐다.처음엔 나무로 지은 학교였다.마루로 바닥을 놓고 벽에도 나무를 이어 붙여 만들었다.건물은 매우 작았다.1학년 때 그 건물을 헐고 새로 건축했다. 학교를 지을 때 교실이 없어서 비가 오면 민가의 넓은 방에서 공부했고,비가 오지 않으면 남의 묘에 가서 야외수업을 했다.얼마나 열악했는지 상황이 떠오르고도 남는다.그렇게 지어진 학교에서 김씨는 공부를 했다.세월이 흘러 학교를 헐고 세 번째로 다시 지었다.장비가 없어서 학부형인 동네 사람들이 나와 터를 닦았다.학교 지을 때 흙이 무너져서 흙더미에 깔려 돌아가신 분도 있단다.그때 죽은 분이 제비초교 1회 졸업생이었다.안타까운 현장이었다.그렇게 마을사람들과 함께 지은 학교가 지금 미술인촌으로 쓰고 있는 건물이다.학교는 마을사람들이 토지를 기부해서 처음 지었다고 한다.학교주변 나무는 아이들이 심었다.지금 있는 커다란 미루나무는 아이들이 꺾어 심은 것이다.운동장 주변의 나무는 아이들 손때가 묻어 있다.

제비초교는 이 마을 어린이들의 놀이터였고,어른들의 행사터였다.아이들은 종일 학교운동장에서 놀았다. 어른들은 체육대회를 운동장에서 했으며,추석 행사,노래자랑 등 모든 행사 장소도 학교였다.가끔 오는 이동극장도 밤새 운동장에서 열렸다.폐교되고 나니 공 차러 오는 사람도 없고 마을행사도 열리지 않는다.운동장에서 놀 아이들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김 씨가 학교 다닐 때는 문구점을 자체 운영했다.물론 학교 밖에도 문구점이 있었다.그러나 학교 밖 문구점은 주로 학용품 보다는 사탕 같은 군것질을 사는 곳이었다.학교 안에서도 학용품 판매를 했는데,버스도 다니지 않아 시내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그래서 학교에 학용품을 두고 6학년들이 돌아가면서 판매 당번을 했다.공책이며 연필이며 싸게 살 수 있어 좋았단다.

▲ 현재 학교내부 모습.
▲ 현재 학교내부 모습.
학교는 학부형들과도 함께 했다.겨울이 되면 학부형들이 며칠 시간을 내서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사용할 나무를 했다.학교 뒷산에 올라가 장작을 만들어 쌓아뒀다.운동회 때는 학부형과 같이 하는 놀이가 유난히 많았다.운동회 때 청군과 백군이 드나들게 한 솔문도 학부형들이 만들었다.선생님들은 주로 관사에 살았지만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려 식구 같았다.모내기를 할 때면 매일 선생님들이 현장을 찾아 점심을 같이 했다.소풍은 학교와 가까운 자연저수지나 수목원에 많이 갔다.냇가가 있어 좋았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나오던 급식이 생각난다.가끔 우유가루도 줬지만,주로 옥수수가루였다.빵도 찌고,죽도 쑤어서 점심을 먹었다.그때 그 추억이 오롯이 서려 있다.이제 학생들은 없고,미술인촌으로 바뀌었지만 그 때 생각이 모두 난단다.28명이 졸업한 8회 동창생으로 자식들도 모두 제비초교에 보내며 학교와 함께 역사를 봐 온 김 씨는 자신의 기억과 추억을 그렇게 털어놓았다.


◇ 이학주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장=정선 출신으로 강원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강원대 교양교육원 강사,춘천문화원 향토자원조사 연구위원,광주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저서로 ‘강촌에 살고싶네’,‘횡성에 뿌리내린 태기왕을 찾아서’,‘하추리 사람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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