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식 논설위원

 욕망이 없는 인간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욕망이 사라진 인간이란 삶을 포기한 사람일 뿐이다. 그렇다 하여 욕망 그 자체가 인간을 인간답게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인간 실존의 딜레마는 바로 여기에 있다. 끊임없이 생명의 본질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그것을 억제하려는 반성 사이의 갈등이 인간의 본질일지 모른다. 최근 우리들 사색의 주제는 마땅히 '인간에게 욕망이란 무엇인가?' 혹은 '인간은 말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다. 사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요즘 우리는 2010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와 관련해 '노년에 어떻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가?' 하는 문제에 특히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맡기고 젊음을 되찾은 파우스트적 타락을 비판할 것인가, 옹호할 것인가를 두고 갈등한 괴테의 주제와 고민에 우리도 한 번 빠져 봐야겠다는 것이다.
 무서우리만큼 평생 '자리'와 '감투'를 목표 삼아 뛰어 온 김운용씨를 볼 때 우리는 우선 그의 일흔을 넘긴 나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최근의 그의 욕망이 이른바 노욕(老慾)임을 단정하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노욕은 다만 지탄의 대상일 따름이며, 그리하여 모든 노욕은 어느 경우이든 추한 것인가? 우리는 일단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란 답을 상정한다.
 하나님의 명에 따라 아들 이삭을 바치려 함으로써 드디어 '믿음의 조상'이 되는, 백 세를 넘긴 아브라함의 성스러운 행동에 우리는 결코 '사욕(私慾)'이라며 비판을 가할 수 없다. 또 곧은 낚싯바늘로 세월을 낚으며 뜻을 세울 욕망을 품고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주(周)나라 무왕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태공망(太公望) 강여상(姜呂尙)을 사리사욕에 눈먼 아흔 살 늙은이라며 낮게 평가해선 안 될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질과 크기와 방향에 따라 욕망이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이다. 나이 먹어 사욕에 눈멀게 되면 추한 것이요, 늙어 대의(大義)를 좇으면 명예롭다. '회남자(淮南子)'의 말처럼 "욕심이 많으면 의리가 적어진다"지만 그 욕심이 공공을 위한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사소한 개인적 의리 따위는 단호히 저버리는 것이 마땅히 더 공의(公義)로울 것이다.
 다시 '파우스트'를 떠올려 보자. 선과 악, 영혼과 욕망이라는 당시의 이분법적 기독교 세계관에 일격을 가한 '욕망'과 '인간다움' 사이의 실존적 딜레마를 담고 있는 '파우스트'에 우리들이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감동을 느끼는 까닭은 그것이 고뇌하는 인간의 본질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김운용씨의 내면에 이런 높은 수준의 갈등이 있었는지 질문하는 게 아니다. 다만 프라하에 가기 앞서 '나의 욕망은 과연 무엇인가?' 하고 진실한 인간적인 고민을 한 번 해 보았느냐 묻고 싶은 것이다.
 또 의문하건대 김운용씨의 행동이 전북이나 무주와의 의리를 앞세운 지극히 '인간다운' 갈등의 결과였을까, 아니면 전적으로 IOC 부위원장 감투를 쓸 목적이었을까? 우리들의 이 물음은 당연히 우문이다. 애석하게도 김운용 씨는 진실로 아무 고민 없이 이 두 사안 모두에 지나치게 골몰한 나머지 그만 공의를 잃고 말았고, 그리하여 안타깝게도 추한 말년으로 접어들게 됐다.
 결론적으로 존 밀턴이 소리쳤으되 "모름지기 노인이 걸리기 쉬운 병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탐욕이니라" 그대로 김운용씨는 자신의 욕망과 관련해 괴테적인 번뇌, 철학적인 고뇌, 인간적인 갈등을 겪거나 스스로에게 한번 가해 보지 않음으로써 노년의 파시즘적 탐욕, 욕망, 노욕에 빠져 마침내 영혼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국회 동계특위가 뭐라 결론을 내리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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