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이 쉬었다 가는 명당, 어스름한 전설 속에 있는 웃음소리
1944년 6월 25일 설립인가
1998년 9월 삼흥분교장 개편
사통팔달 터에 교정 세워져
학교 건립 예견한 스님 전설
마을 구심점·상징 역할 톡톡
주민 반대 불구 폐교 아쉬워
2001년까지 1310명 배출
체험학습장·고시원으로 운영

 

▲ 삼흥초교전경
▲ 삼흥초교전경

2 동해 삼흥초교
스님이 학교 터에 절을 하다

 

동해시 신흥동,산을 넘어 한참을 가니 작은 학교가 나왔다.산으로 오르는 계곡을 따라 길이 나 있었다.계곡에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계곡 옆에 있는 학교 마당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소나무 군락은 삼흥초등학교의 역사를 말해 주는 듯했다.

학교 입구로 들어가 봤다.정문에는 ‘삼흥초등학교’ 대신에 ‘동해삼흥체험학습장’이라고 쓰여 있었다.정문으로 들어서자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늘어서 있고,운동장에는 누군가 무,파 등의 채소를 심어두었다.정다운 교정은 그대로인데 주인이 바뀌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건물 쪽으로 들어갔더니 누군가 나와 어떻게 왔냐고 물었다.학교를 찾은 이유를 말했더니,자신들은 이곳에 공부를 하러 온 사람이라고 했다.어느 새 체험학습장은 다시 고시원으로 바뀌어 있었다.학교가 폐교되고 2년 간 체험학습장으로 운영하고,이어서 민간에 임대해서 고시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공부하는 장소로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학교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건물 앞에는 모두의 기억에 있는 두 개의 구조물이 나란히 서 있었다.‘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 쓴 독서상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고 죽었다는 이승복 상이었다.석고로 만든 하얀 독서상과 청동색의 이승복 상이 묘하게 대조를 이뤘다.빛바랜 독서상이 폐교 된 삼흥초교의 역사를 말하는 듯 치우지 않은 나무사이로 서 있는 모습에 마음 울컥했다.반면 제복 같은 옷차림에 주먹을 불끈 쥐고 서 있는 이승복 상은 아직도 그 시절의 이데올로기를 새겨넣는 것 같아 씁쓸했다.갑자기 초등학교 때 전교생 앞에서 6·25웅변대회를 했던 생각이 났다.작은 손을 높이 쳐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 연사 외칩니다”라고 소리쳤던 추억 말이다.운동장 앞쪽으로 걸어 나오니 코끼리,기린,낙타,사자상 등이 옛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추억은 동물상에도 남아 있었다.

주변 어디를 봐도 틀림없는 초등학교였다.그러나 신나게 뛰놀던 초등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어쩌면 당연한 모습일텐데,왜 아직도 기억 속에는 고무줄놀이 하던 코흘리개 순이와 말타기 하던 개똥이의 잔영이 남아 있을까.옹기종기 작은 책상과 걸상에 앉아 글공부를 하던 모습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학교 앞 기념사진 1983년 33회 졸업기념 단체사진 학생들과 함께 한 마을 칠순잔치 모습 경포앞바다에서 찍은 수학여행 기념사진
▲ △학교 앞 기념사진 △1983년 33회 졸업기념 단체사진 △ 경포앞바다에서 찍은 수학여행 기념사진 △학생들과 함께 한 마을 칠순잔치 모습

학교를 나와서 집들이 많은 곳으로 갔다.그곳에 가면 옛날 학용품을 팔던 가게주인도 만나고,학교에 학생들을 보냈던 학부모도 만나고,운 좋으면 삼흥초교 출신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품은 채였다.빨간 함석지붕을 한 커다란 농가가 보였다.“계십니까?”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예” 누군가 집 안에서 대답을 했다.문을 여니 할머니 한 분이 있었다.이 모(87) 할머니를 만났다.학교의 역사와 함께 마을에서 사신 분이었다.5남매를 모두 삼흥초교에 보냈다고 했다.사진 몇 장을 장롱 깊숙이에서 꺼냈다.자식들과 가족친지들이 삼흥초교에서 찍은 사진이었다.빛바랜 사진 속에는 그간의 삶들이 차곡차곡 배어 있었다.꽃다발을 들고 있는 딸의 졸업사진,가족들과 친지들이 정문에서 학교를 배경으로 한복을 곱게 입고 찍은 사진들이다.참 정겨운 장면,추억 속 현장이었다.그러나 안타까웠다.할머니는 사진 속 그 인물들을 눈이 침침해서 잘 볼 수 없었다.그리고 기억도 가물가물하여 인터뷰를 할 수 없었다.다만 5남매를 모두 삼흥초교에 보냈다고만 말씀하셨다.그리고 산고라데이로 소풍을 갔던 말씀을 했다.운동회 때 아이들과 함께 했던 추억도 조금은 떠올릴 뿐이었다.집을 나올 때마당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 몇 개를 따서 건네주었다.세월은 추억으로 남은 기억마저도 그렇게 앗아가 버렸다.평생을 초등학교와 같이 해온 기억이 세월 속으로 묻힌 것이다.

아쉬움을 간직한 채 학교 앞을 나와 맞은 편 서학골 골짜기로 가보았다.머리가 하얀 할아버지 한 분이 산책을 하고 계셨다.양 모(85) 할아버지였다.삼흥초교 얘기를 꺼내자 줄줄이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이곳에 학교가 생길 것을 미리 안 설화를 말씀해 주셨다.학교 뒤 마을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천(飛天)이라는 곳이고,학교 옆의 깊은 골은 도화동(桃花洞)인데 이곳은 도화낙지형(桃花落地形)의 명당이 있는 곳이며,학교 앞의 골은 서학골이다.서학골의 뜻은 학이 쉬었다 가는 곳이라,물 좋고 인심 좋아 사람이 오래도록 살 수 있는 곳이란다.바로 그런 산세의 중간에 사통팔달로 멈춰 있는 곳이 삼흥초등학교다.그런데 어느 날 이곳에 스님 한 분이 찾아왔다.그 스님은 학교가 세워질 터를 보고 말했다.“아이고, 저기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구나.선생님들에게 절이나 하고 가야지”하며 절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학교가 생길 것을 미리 알았다.양 할아버지의 전설 이야기에는 폐교 된 학교에 대한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양 할아버지는 삼흥초교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학교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처음 지어져서 안에는 시멘트와 회벽을 하고,바깥은 검은 색 나무판자를 포개서 벽을 올렸다고 했다.1944년 6월 25일 설립인가를 받아 지어진 건물이다.이 건물이 한국전쟁을 지나고 또 세월이 지나 낡아지자 새로 지었는데,지금 있는 건물이다.삼흥초교는 1998년 9월 1일 학생 수 감소로 삼화초교 삼흥분교장으로 개편됐다.분교가 된지 3년 후인 2001년 2월 16일 5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총 졸업생 1310명을 내보내고,학교는 3월 1일 폐교됐다.할아버지는 학교가 마을의 구심점이었고,마을의 상징이라고 했다.주민들의 동의가 부족하고,아이들도 몇 있었는데 폐교가 돼서 원통하다고 했다.아이들 3남매를 모두 삼흥초교에 보냈다.마을주민과 선생님들의 사이도 무척 좋았다.소풍은 서학골로 많이 갔다.서학골은 물이 좋고 강폭이 넓어 자갈도 많았다.운동회 때는 학생 수가 많지 않아 모든 프로그램이 학부모와 같이 하는 것으로 만들어졌다.운동회 날이면 각자 집에서 평소에 먹지 못하던 떡을 비롯한 맛있는 음식을 해서 나눠 먹었다.마을에 아이 울음소리가 끊기자 학교도 없어졌다.먼 추억 속으로 그렇게 삼흥초등학교는 사라졌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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