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길 전 속초신협 이사장

▲ 이대길 전 속초신협 이사장
▲ 이대길 전 속초신협 이사장

보생와사(步生臥死)란 말이 있다.걸으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는 뜻이다.살아있는 사람이 걷지 못하면 두렵고 불행한 일이다.동의보감에서 약보다는 식보요,식보보다는 행보라고도 했다.필자는 보생의 의미를 나름대로 행동하는 건강한 삶이라고 생각한다.삶은 열정이며 혼자가 아닌 공공선이 전제돼야 한다.따라서 보생와사는 무조건 걸어야 살고 누우면 죽는다는 뜻은 아닐 성 싶다.

교류와 영감이 있고 행동이 있고 선(善)이 있는 더불어 사는 삶,인간답게 사는 것이 보생(步生)일 것이다.이기적인 생각에서 영감이 끊기고 행동이 없고 시간이 지날수록 주위에 친구가 줄어들고 교류의 폭이 좁아지고 기억이 상실되고 병들고 암에 노출되고 노쇠화 되면 그것은 분명한 와사(臥死)다.그래서 병석에 누울 때 까지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영감마저 잃으면 그것은 고독한 죽음의 길목이다.

독일의 소통 전문가 코르넬리아 코프는 “우리가 정적을 난감하게 느끼는 이유는 정적 자체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조용할 때 찾아오는 생각이 두려워서”라고 했다.물론 어느 누구도 늙으면 병들고 죽어가는 생로병사의 이치를 벗어날 수는 없다.필자는 사무엘 울만의 ‘청춘(靑春)’이라는 시를 사랑한다.늙고 젊음은 어떠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다.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팔십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다.꿈과 희망,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는 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이 들수록 돈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 점점 강해지는 사회에 살고있다.이곳 저곳이 아픈데 분수 넘치는 돈을 가진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돈과 권력에 존재 의미를 둔다면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세월은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며 머물고 있을 뿐이다.다만 지나고 보면 숨 가쁜 회한뿐 일 것이다.

삶의 1%는 영감이요,99%는 행동이다.의지가 없고 찾아갈 곳도 없고 찾아오는 벗이 없고 휴대폰 벨소리마저 싫어하는 노인은 무척 슬프다.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에 대해 가장 아름다운 감사함을 느낀다는 것처럼 우리 삶 주변에는 감사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널려있다.나보다 어려운 사람이 있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정신적,물질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법정 스님의 ‘여보게 부처를 찾는가’라는 시에서 “부처는 절에 없다네.부처는 세상에 내려가야만 천지에 널려 있네.내 주위 가난한 이웃이 부처요,병들어 누워있는 자가 부처라네.그 많은 부처를 보지도 못하고 어찌 사람이 만든 불상에만 허리가 아프도록 절만 하는가.” 이 시 구절에서 현세의 부끄러운 종교의 힘보다 강한 삶의 현실적 메시지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누구나 나이를 초월해 부여받은 역할에 대해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정직과 베풂이야말로 진정한 보생이다.지금 무책임하고 헌신이 없는 정치에서 국민들은 한없이 우울하다.끼리끼리 봐주고 상대편의 진실을 거짓이라 우기는 정치.정말 어리석은 와사(臥死)요,배은망덕한 보생(步生)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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