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란, 조곤조곤 흘러가는 강물 같은 아련함
무릇 예술은 삶의 반영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생존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의 영혼을
위무해 주고,밀려난 사물들의
자상한 정서도 오롯하게
바로 세워야 하지 않을까

무릇 예술은 삶의 반영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생존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의 영혼을
위무해 주고,밀려난 사물들의
자상한 정서도 오롯하게
바로 세워야 하지 않을까.

일찍이 “문학은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 디테일을 기록해야 한다”고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인 김화영 씨는 얘기했다.‘메밀꽃 필 무렵’이란 제목의 짧은 소설 한 편 안에서도 우리는 90여년 전 한국 벽항궁촌의 대명사라고 해도 좋을 강원도 봉평의 장터는 물론 그 일대의 자연을 선명한 돋을새김으로 감상할 수 있다.그랬기에 멋진 레토릭에 능했던 이병주 소설가도 이런 말을 남기지 않았겠는가.“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라고.덧보태자면 이병주의 소설은 역사학의 뼈대에 기대되 사람 냄새와 숨결을 되살려내는 작업이었다는 말이다.그것이 바로 문학의 힘일 것이다.독자의 사랑이 보태지면 문학은 사실을 기록한 역사의 힘을 능가하는 게 아닐까.이효석은 이제 어엿하게 봉평을 대표하는 배경 음악이 되었고 이효석 문학관은 어느새 전국 각지의 문학인과 관광객이 교집합을 이루는 명소의 공간이 되었다.

과거 서민들의 생활상,그 중 장터 풍경은 기분 좋은 상념을 떠오르게 한다.옛날 같으면 궁상스런 삼간두옥에 좀 먹은 탕관이나 쓰고 앉아 공맹이나 논할 위인이어서일까.유독 나는 씩뚝꺽뚝 질그릇 깨지는 듯한 목소리도 좀 들리고,냇자갈처럼 여무지고 대추나무 방망이처럼 오달진 사내들이 술잔을 겨끔내기로 돌리는 전통장의 선술집을 머릿속에 그리곤 한다.달팽이 같은 토담집에 누추한 봉노면 어떻고,추녀가 땅에 끌리는 꾀죄죄한 주막이면 어떤가.인생의 허허로움과 쓸쓸함을 아는 이들끼리 좁은 목로에 둘러앉아 따뜻한 눈길과 손길로,슬퍼할 때 슬픔을 덜어주고 기뻐할 때 기쁨을 키워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한 잔의 술을 마시는 일.그것은 마음의 하늘에 노을이 지는 것’이라고 어느 시인도 노래하지 않았던가.우리들은 이미 아는 나이가 아닌가.젊었을 때는 ‘울부짖음’이었는데 세월이란 게 그냥 조곤조곤 흘러가는 강물 같은 아련함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지난 호에 이어 두 번째로 강조하고 싶은 점도 그와 같다.허생원,조선달,동이를 비롯해 스치듯 묘사된 장터사람들은 한결같이 다들 평생동안 생계에 주름살이 진 인물들이다.부대끼는 식솔들의 끼니를 잇기 위해서,아니면 지아비나 지어미를 공양하고 부축하기 위해서 그들은 물건을 팔고 푼돈을 번다.땀이 배어 있는 돈이 제일로 좋은 돈이라고 하더니.이문도 박하고 밑천 될 것도 없는 것을 가지고 하루 종일 모진 뙤약볕 아래에서 온갖 승강이들을 벌인다.장터를 메주 밟듯 돌고 돌다가 결국 어느 산골 밭둑을 베고 죽을 팔자지만 식량이 생긴다면 구천으로 오라 해도 따라갈 사람들이다.

그러나 분잡스런 난전의 어느 모퉁이에도 실의에 빠져 넋을 놓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구차함이 가랑잎처럼 쌓이고 뼛골이 참빗으로 빗어 내리는 듯 아린 삶이지만 그들은 절대로 기가 죽지 않는다.살아가려고,살아남으려고 하는 백성들에게는 실의란 없다.아니,실의도 사치인 것이다.누군가 그랬다.“인생은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가.삶이란 그냥 견디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게 아닐까.인생은 모르니까 사는 것이다”라고.

무릇 예술은 삶의 반영이다.그렇다면 예술가들은 생존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의 영혼을 위무해 주고,밀려난 사물들의 자상한 정서도 오롯하게 바로 세워야 하지 않을까.그리고 나 같은 화가는 ‘메밀꽃 필 무렵’을 읽은 뒷맛처럼 마음이 착해지는,별빛처럼 마음 모퉁이가 환해지는 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을까.가끔 좋은 소설은 내게 낮은 목소리가 큰 목소리보다 더 크고 위대하며 의미가 있음을 일깨워준다.예술가들은 제각기 생각들이 다르겠지만 나만이라도 큰 것,강한 것,자극적인 것이 세상의 중심에서 위압하는 이 시대에서 작은 것,약한 것,그리고 소박한 것이 우리 삶의 진정한 뿌리라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싶다.소설의 끝 문장처럼 오늘도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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