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진달래·가을이면 코스모스 활짝 핀 등굣길 따라서
꽃동네 학생들의 아름다운 꿈
1953년 화방재 고갯길에 건립
직접 캔 흙으로 미술 수업 진행
얼목이·물골·새목서 학생 모여
동네 어른·선생님과 함께 어울려
모내기철 전교생 일손 거들어
1994년 폐교 479명 졸업생 배출

▲ 옛 화방분교 전경


화방(花坊)초등학교는 ‘꽃동네’ 학교다.화방은 봄날 진달래꽃이 온 산을 가득 메워 불러진 이름이다.생각만 해도 그 아름다운 자태가 눈에 선하다.황홀한 꽃동산을 넘으며 사람들은 그곳을 ‘화방재’라 불렀다.1953년 2월 19일 꽃이 활짝 핀 고갯길 입구에 마을의 아이들이 다니는 화방분교가 세워졌다.

이 학교 출신 원 씨를 화방분교 교정에서 만났다.원 씨는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초등학교 시절을 묻자 술술 옛 이야기를 풀어 헤쳤다.원 씨에게 “학교를 다니던 시절 무엇이 제일 기억에 남느냐”고 물었더니,“이승복 동상”과 “방공방첩”이라고 했다.학교 앞 교정에 새워진 이승복 동상.그곳에는 아직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그 당시 슬레이트로 지어진 학교 옥상에는 “방공방첩”이라고 크게 써져 있었다.

 

 

 

▲ 현재 사진

 

공산당을 막고 간첩을 막는다는 뜻이다.매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때가 되면 운동장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방공 웅변대회를 열었던 기억이 선명하다.어린 학생이 주먹을 불끈 쥐고 공산당을 무찌르겠다고 소리쳤다.학생들은 박수를 치면서 연사의 말 한마디에 같은 다짐을 했다.원 씨는 그런 얘기를 하면서 “지금 회상하면 ‘그 때는 시대가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원 씨가 학교를 다닐 때는 학생 수가 많지 않았다.화방분교에서 초등학교가 됐다가 다시 분교가 됐던 시절이다.같은 교실에서 두 개 학년씩 수업을 했다.학교에 선생님이 네 분인데,한 분이 두 개 학년을 맡아 이 쪽에서 한 학년,또 저 쪽에서 한 학년씩 왔다 갔다 하면서 수업을 했다.1학년에서 6학년까지 모두 있었지만 졸업식은 노천 1리에 있는 노천초등학교에 가서 했다.당시 원 씨가 졸업할 때는 모두 6명이 졸업을 했다.

원 씨는 미술시간을 떠올렸다.미술이 있는 날은 같은 학년이 아닌데도 다 같이 모여 찰흙을 가지고 만들기를 했다.화방초등학교 학생들은 도시처럼 찰흙을 사지 않고 직접 캐러 다녔다.당시 비포장 도로여서 도로 옆에 흙이 무너져 내리면 지층이 보인다.그 곳에 찰흙이 있어서 학생들이 캤다.돌은 골라내고 부드러운 흙을 만들어 찰흙 빚기를 했다.찰흙 뿐 아니라,수업 시간에 필요한 수업기자재는 대부분 직접 마을에서 구해 썼다.

원 씨는 자연스럽게 학교 주변 마을 이야기를 했고,이어서 소풍 이야기를 들려줬다.화방재를 기점으로 노천 1리와 2리로 나눠지고 강 역시 북한강과 남한강이 된다고 했다.노천 1리는 공작산에서 물이 흘러 화양강이 되고 화양강은 다시 북한강으로 간다.또 화방은 대학산에서 물이 흘러 금계천을 이루고 금계천은 횡성을 지나 남한강으로 흘러든다고 했다.마을은 금계천을 중심으로 모두 재를 넘어 이뤄졌으므로 학생들은 등하교를 할 때 이 재를 넘어 다녔다.얼목이,물골,새목이라는 동네였다.마을이 나누어져 있어서 소풍도 마을을 옮겨 다니면서 갔다.각 동네에 있는 개울가나 논 한 가운데에서 소풍을 했다.개울가에 가면 물놀이를 했고,수건돌리기와 보물찾기도 했다.

그런데 소풍은 아이들보다도 어른들 소풍이었다.아이들을 먼저 집으로 보내고,어른들이 선생님하고 같이 약주를 나누었다.동네 어른들이 “선생님,한 잔 하시죠?”하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렸다.운동회를 해도 운동장 가에 솥을 걸어놓고 육개장을 끓여 한 그릇씩 먹으면서 잔치처럼 하루를 보냈다.소풍과 운동회는 모두 마을잔치였다.

모내기철처럼 바쁜 농사철이면 학생들이 모두 나가서 일을 거들었다.학교 꽃밭을 가꾸고,꽃길 조성을 했다.봄에 심은 코스모스가 가을에 꽃을 피우면 학교 가는 길이 꽃길이었다.어린 학생들의 손길도 소용이 있던 시절이었다.원 씨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화방분교 다녀간 사람들이 칠판에 새긴 기록들(위쪽 사진 위)과 화방분교 폐교 안내문
화방분교 다녀간 사람들이 칠판에 새긴 기록들(위쪽 사진 위)과 화방분교 폐교 안내문

 

금계천은 학생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금계천 중간에 용소 또는 용수맥이라는 곳이 있다.옛날에 용이 이곳에 똬리를 틀었다가 하늘로 승천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이 곳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아이들의 키를 넘는 물웅덩이였다.그래서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용소에 가서 수영을 했다.수영복이 따로 없던 시절이어서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들어갔고,집으로 가다 보면 젖은 옷이 다 마르곤 했다.

시골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눈에 선생님들은 모두 멋있어 보였다.선생님들이 외지에서 왔기 떄문에 동경의 대상이었다.세련되어 보이기도 했다.관사에서 기거하시는 분도 있지만 멀리서 출퇴근을 하셨는데,선생님들이 모두 서울 사람처럼 보였다.원 씨는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쉬지 않고 풀어놓더니,마을에 회의가 있다면서 자리를 떴다.

나는 텅 빈 교정을 둘러보기로 했다.아이들이 뛰어놀고,조회를 하고,웅변 대회를 했던 운동장은 농사를 지으려고 트랙터로 갈아 놓았다.세월은 학교를 그렇게 변하게 했다.학교 앞에는 아직도 낡은 이승복 어린이 상,독서하는 어린이 상,남궁억 상 등이 있었다.교실에는 졸업생들이 왔다 간 흔적이 있었다.그 곳에는 “폐교 안타까워요.옛 생각 절로 나는군요.마음이 찡합니다”라는 문구들이 쓰여 있었다.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으로 나오는데,그 곳에 교장 허만칠 공덕비가 서 있었다.“두메산골 아동 위해 오랜 세월 몸 바쳐서 학교 발전 이루었으니 그 높은 뜻을 기리고저 이 비를 세우노라 1971년 12월 10일 화방교 육성회 일동”이라는 글귀와 함께 였다.

그리고 폐교를 알리는 안내판은 1994년 3월 1일 폐교될 때까지 47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알리고 있다.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원장>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