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민 상처·고통 ‘현재 진행형’
보상 하세월 일상 회복 먼 얘기
산불에 동생 잃은 고성 김영봉 씨
일상 무너지고 가족들 트라우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

[강원도민일보 이동명 기자]4일은 동해안 산불이 발생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지난 해 4월4일 발생한 동해안산불은 강풍을 타고 산을 넘어 시내까지 덮쳤다.전 국민이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 상처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고성과 속초는 아직 보상조차 제대로 이뤄지지않고 있다.동해시 망상동 망운산과 석두골,망상오토캠핑리조트 일대는 황톳빛 속살,그대로다.

이재민들은 아직도 그날의 기억들로 고통받고 있다.그래도 속초지역 집단피해지인 장전마을은 전소된 가구 대신 새 집이 들어서며 재기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강릉시 옥계면 일대를 할퀴고간 화마의 상흔에도 어느 덧 할미꽃이 피어나는 등 생명이 움트고 있다.

▲ 지난해 4월 발생한 산불로 동해시 망상동 망운산과 석두골,망상오토캠핑리조트 일대가 아직도 황톳빛 속살을 드러내 놓고 있다.
▲ 지난해 4월 발생한 산불로 동해시 망상동 망운산과 석두골,망상오토캠핑리조트 일대가 아직도 황톳빛 속살을 드러내 놓고 있다.

동해안산불 1년,끝나지 않은 삶의 현장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3일 고성 토성면 용촌1리.불에 타 앙상하게 변한 공예품공장 시설물 뒤로 그을리고 고사된 소나무 몇 그루가 쓸쓸히 서있다.녹슨 건축물 뼈대 앞 쪽에는 ‘내 동생 영혼을 잠들게 하라’,‘나는 분노하고 있다’ 등의 문구가 담긴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였다.넉달만에 이곳을 찾은 김영봉(63)씨는 폐허 이곳저곳을 살피다 금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김영봉씨의 남동생 A씨는 지난해 4월 4일 밤 이곳에서 누나를 피신시키고 불을 끄다가 숨졌다.동생은 속초 영랑동에 살았다.산불이 한창 번지던 그날 저녁,속초지역도 사방이 불타고 있었지만 A씨는 다급히 자동차로 3분정도 거리인 고성 용촌리 공예품 공장에 남아있는 누나를 구하러 향했다.중학교에 다니는 A씨의 아들과 딸이 “영랑동 주민도 대피하는 상황이니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A씨는 “걱정하지마라,빨리 갔다올게”라고 말한 뒤 용촌리로 떠났다.장례식 뒤 부검도 진행됐다.

▲ 지난달 27일 차가운 비가 내린 고성 토성면 용촌1리.동생이 지난해 4월 4일 화재 진압 중 숨진 자리를 김영봉 씨가 둘러보고 있다. 이동명
▲ 지난달 27일 차가운 비가 내린 고성 토성면 용촌1리.동생이 지난해 4월 4일 화재 진압 중 숨진 자리를 김영봉 씨가 둘러보고 있다. 이동명

김영봉씨는 지난해 산불 발생 후 일주일 넘도록 잠을 못잤다.전에도 수면제를 복용했으나 화마를 겪은 후 불면증은 더 심해졌다.병원에서 더 강한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기 시작했다.소주 1잔,맥주 반 컵이면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지만 이제는 술 없이는 하루를 버티기가 힘들다.오전 9시쯤 일어나 멍하니 앉았다가 수면제에 비몽사몽 상태로 아침식사를 대충 떼우고 오후 1시쯤 아르바이트를 위해 속초 소재 당구장에 나간다.멍한 상태가 지속되다가 오후 5시 쯤 약 기운이 떨어진 뒤에야 정신이 돌아온다.지옥같은 현실에 또다시 술을 마신다.자정이 넘어 퇴근 후 집에 오자마자 수면제부터 찾는다.

김씨는 예전 도박·사업 부도로 동생 남매를 지독하게 괴롭혔다.죽은 남동생은 착실히 모은 돈으로 마련한 아파트가 형에게 보증을 잘 못 선 탓에 경매로 넘어가도 원망 한 마디 없었다.초교 교사인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1000만원,2000만원은 그냥 주면 줬지 빌려주는 경우가 없었다.

“동생이 왜 그렇게 아등바등 불을 껐는지 아세요? 내가 애지중지하는 목공예품과 40년여간 가꿔온 공장을 지키려 했을거에요.”


A씨는 신용불량자에서 최근 벗어나 재기를 꿈꾸는 형의 모든 희망이 눈앞에서 불타는 모습을 보고 불을 끄려 애썼다.공예품공장 주변의 신나통과 가스통 폭발을 막으려 동분서주하던 A씨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A씨는 병원으로 옮겨졌고,결국 공장도 잿더미가 돼 앙상하게 녹슨 철제구조물만 남았다.당구장 아르바이트를 하던 김씨가 다급히 병원에 도착했을 때 동생은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있었다.그 후 누나는 트라우마가 심해 병원에 다닌다.김영봉씨의 딸도 공무원을 휴직한 상태다.

김씨는 산불발생 1년이 된 지금까지 적십자사 성금 425만원과 교통비 24만원을 받을 것을 제외하면 국민성금이나 국비 등 지원을 받지 못한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동생 유족들은 보상에 관한 권한를 김영봉씨에게 일임한 상태다.한전은 A씨에 대해 화재와 사망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며 민사책임을 인정하지 않은채 도의적 측면에서 위로금을 제시하고 있다.

김영봉씨는 “한전 측에 재협상을 요청한 상태로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소송할 생각은 없다”면서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동명 ldm@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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