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식 논설위원

 며칠 전 제주도 서귀포에서 열린 한·일 편집인 세미나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이 드러났다. 매년 양국 편집인협회가 번갈아 개최하는 언론인 교류 모임의 올해 테마는 바로 '북한을 바라보는 한·일의 시각'이었다. 2차 6자 회담이 예상되는 시기에 열린 이 세미나에서 열띤 토론이 전개됐다.
 이 날 요미우리신문의 야마오카 논설위원의 두 가지 질문이 필자의 피를 끓게 했다. 우선 하나는 일본의 최근 외교의 주제가 결코 일본인 납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듣고 흥분 잘하는 필자는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 자치 지역에서 온 사람임을 전제로 반론을 제기했다. ; 과연 그런가? 일본은 정말 6자 화담 성사 혹은 북한과의 외교를 원숙하게 진행시키고 있다 믿는가? 그렇지 않다. 작년 10월 일본에 갔을 때 일본열도는 온통 피랍 일본인의 귀환에 충격, 눈물,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그 때 한국의 한 지방신문 논설위원은 북한의 비인도적 만행, 북한의 역사 지체, 북한의 외교력 부재 등에 막막한 절망감을 느꼈고, 일본인들의 충격과 눈물과 분노를 어느 정도 공감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안의 원인자인 일본이 어느 날 갑자기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급전해도 좋은가 하는 물음에 스스로 또 다른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 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여전히 납치 문제에 집착해 동북아 정세를 긴장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 대표적 예가 보름 전에 끝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어떻게 좀 '특별성명'에다가 북핵 문제, 납치 문제를 넣어볼까 했지만 일본은 각국 정상들의 냉담한 반응만 얻고 말았다.
 또 그 며칠 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조일정상회담'을 이끌어낸 다나카 히토시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을 후퇴시키고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을 대북 책임자로 전진 배치시켰다. 아베 신조는 누구인가? 그 할아버지 때부터 아버지 손자 대에 이르기까지 3 대에 걸쳐 강성 보수 우파의 대표적 가문의 한 인물이 아닌가. 이런 인물의 전진 배치는 납치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늘어지겠다는 뜻이다. 어제 있었던 총선을 의식해서도 필요한 조처였을 것이다. 강경 우파적 발언을 일본 유권자들이 즐긴다는 이 저급한 정치적 포퓰리즘. 이런 식의 계산으로는 동북아 정세를 부드럽게 가져갈 수 없다.
 야마오카 논설위원의 또 하나의 주장은 "한국은 명확한 스탠스(태도)가 없다" "한국은 지금 매우 혼란스럽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다시 목청을 높인다. ; 그렇다. 한국은 지금 목하 이념의 혼란을 겪고 있다. 마치 해방공간에서의 그것처럼. 그럼에도 아무 진지한 고민이나 논란 없이 일본이 극우 일색이었던 것에 비해 한국은 얼마나 철학적이며, 한국인은 얼마나 고뇌하는 국민인가. 그러므로 한국은 이른바 '국론 분열'이 있을 수 없는 일본인이 보기엔 '명확한 스탠스가 없는 나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늘 건강한 논란이 있는 미국이지만, 최근 미국은 예컨대 '9·11 테러는 미국이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라는 내용의 노암 촘스키가 쓴 책 '9·11'을 지식인들이 읽지 않고, 또 스스로 좌파라 주장하는 대학교수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가운데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의 주장만 난무하는 상황이다. 이에 이른바 '제패니스 네오콘'들이 힘을 얻고 있는 중이다.
 이런 분위기가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의 최근 '혼란'을 '국정 스탠스가 없다'고 보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해다. 한국의 스탠스가 뭐냐고? '햇볕정책'이다. 지금의 혼란은 속도, 규모, 호흡의 조절일 따름이다. 이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자 아무도 없다. 대 토론이 없는 일본인들의 눈엔 이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시하라 도쿄도지사의 "한일합방은 조선인이 선택했다"는 따위의 망언이 계속되는 한 일본은 여전히 한국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외교 미숙아일지 모른다.
 야마오카 요미우리신문 논설위원이 몇 마디 반론을 폈지만, 이미 자신 없는 그의 눈은 빛을 잃고 있었다. 작년에 일본 남단 가고시마에서 필자가 그렇게 했듯 일본 언론인들 역시 한반도 남단 서귀포에서 이 날 밤 잠 못 이루고 뒤척였을까?
이광식 논설위원 misan@kado.net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