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수 산림청장의 글에 화답하여

 마침 그 때 중당(中唐) 시인 위응물(韋應物 ; 737∼?)의 시를 읽고 있었지요. "인적 없는 물가엔/고운 꽃 홀로 피고/깊은 숲 속 나무에는/꾀꼬리가 우네/비를 머금은 봄 조수/저녁 되자 더 빠른데…." '저주서간(  州西澗)'이란 시인데, 사실 시의 내용도 그러하지만 특히 시인에게 인간적 매력을 더 느껴 읽던 중이었어요. 위응물은 백성의 질고에 관심을 가지고 간사한 관리를 풍자하고 질타하는 시를 즐겨 쓴 인물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큰 매력을 느낀 건 이보다 이 시인이 경물(景物)과 은자적 생활을 묘사한 시를 많이 썼다는 사실 때문이지요. 앞의 시 역시 그런 풍모를 느끼게 되는 작품입니다. 예의 "깊은 숲 속 나무"와 "비를 머금은 봄 조수"라 표현한 이 시에서 청장과 내가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을 다니면서 어린 시절을 살아온, 대관령 넘어 숲과 물이 맞닿은, 그 아름다운 우리들의 동해안을 상상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 때 책상 위로 전달된 석간 신문에서 최종수 산림청장님의 기고문을 발견한 것은 우연 같지 않아요. 청장께선 "'산불 없는' 즐거운 산행"이란 글에서 말 그대로 '즐거운 산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내가 위응물의 시를 읽으며 대관령을 즐거이 상상하던 것처럼 말이지요. 글은 이렇게 시작되더군요. "신록의 계절인 봄이 오면 산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으로 산하를 물들이고 많은 사람들은 이 경치를 즐기기 위해 산을 찾는다." 그러면서 청장께선 "산림 공무원인 나는 신록으로 파릇하게 물든 봄 산을 바라보면서 산불을 생각한다."고 했지요.
 왜 안 그렇겠습니까. 21 세기 벽두에 동해안 일대의 산불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충을 겪어온 우리로서 어찌 산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어요.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현실적 피해는 물론 잿더미로 변한 송이밭, 물고기가 돌아오지 않는 강과 바다…. 이를 바라보는 우리 동네 농어민들의 그 참절비절함을 또 어찌 필설로 다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상한 일은 우리 친구 최 청장 부임 이후 마을에 큰 산불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보고 친구들은 '하늘이 낸 사람'으로 표현하며 즐거워했지요. 물론 때 맞춰 하늘이 비를 뿌려 주었다기보다 분명 그건 미증유의 자연 재해를 경험한 강원도, 각 지자체 그리고 강원도민들의 음우(陰佑) 때문일 겁니다. 이를 청장께선 "많은 사람이 산행을 즐기는 토·일요일과 공휴일에는 오히려 비상근무 시간이 늘어나 가족들의 얼굴도 잊은 채 잠복근무를 하는 등 산림을 지키기 위한 공무원들의 숨은 노력이 눈물겹다"며 고맙게도 공직자들의 노고로 돌렸습니다.
 "즐거운 산행이 산불로 인해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며 청장께선 글을 맺었지요. 우리 모두의 바람도 그렇습니다. 도내 산림 공직자들이 산불 예방에 여전히 밤낮으로 애써 이미 비를 내리는 하늘의 감응도 보았으니, 청장의 기원이 헛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하신 그대로의 마음이 이어져야 할 것임을 덧붙이고 싶어요.
 '좌전'에 "환란이 있을 때 나라를 잊지 않는 것이 충(臨患不忘國忠也)"이라 했는데, 이 어찌 고금이 다르며 환상(患狀)의 대소(大小)에 다를 수 있겠습니까. 때가 산불을 비롯하여 천재와 인재가 무시로 일어나는 환란의 시대라 청장님의 책무가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얼마 전 남쪽에서 또 큰 산불이 일었지요. 부디 같은 불행이 강원도에서 되풀이되지 않도록 끝까지 긴장을 풀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깊은 숲 속 나무에는 꾀꼬리가 우네(上有黃鳥深樹鳴)." 위응물의 이런 노래를 강원도민을 비롯하여 전 국민이 즐거이 부를 아름다운 봄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청장님의 장구(長驅)와 건안을 기원하며 이만 총총.
이광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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