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식 논설위원
허락한다면 이 기회에 더 깊은 속내를 말해 보자. 지난 몇 개월 간 '매우 불편한 심기'로 '성'을 '담론'해 왔다. 다음과 같은 경우와 비슷하다. 소설가 홍성유가 조선일보에 '장군의 아들'을 연재할 때 몇 평론가들의 비판은 "정리할 역사가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깡패 얘기냐?"였다. 이런 질타를 받았을 때의 홍성유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기분이었다. 특히 탄핵 정국이 몰아치면서 사회 분위기와의 괴리감이 더욱 옥죄어 올 때.
그러나 사실은 '성 담론'만 써 온 것이 아니다. 거의 매일 분권(分權)을 논했고, 예의 탄핵을 주시했으며, 계속하여 경제를 염려하면서 최근엔 고속철을 특히 고민하고 있다. 성만 파고 든 것이 아니며, 육담을 추적하면서도 변화에 민감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을. 4월 1일이면 대한민국에 사상 최초로 고속열차가 달리게 된다. 가슴 벅찬 일이다. 서울에서 출발한 고속철은 그 날 곧바로 동(東)대구로 갈 것이며, 2010년엔 신(新)경주와 울산을 거쳐 부산에 도착할 것이다. 2011년이면 영·호남 내륙 거의 전 지역에 고속열차가 굉음을 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 물류 체계는 마침내 완성 단계에 이르게 된다.
부산역에 붙어 있는 "고속철도! 꿈이 이루어진다"를 보았을 때, 가슴에 뭔가 쿵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플래카드 너머로 고속철 부산역이 우아한 곡선을 자랑하고 있었다. 성냥갑만 하던 옛 건물은 사라지고 거대한 배 모양의 아름다운 부산역이 막 출항하고 있었다. 한 해 200만 명의 관광객을, 아니 이에 20%나 더 늘어난 관광객을 부산으로 불러모을 부산역이. 국제 크루즈, 연안여객선, 국내외 항공망, 고속도로 그리고 마침내 고속철을 이용해 내륙을 묶는 다양한 관광상품이 꽃비 내리듯 쏟아질 그 역사(驛舍)가, 그 역사(歷史)가.
이런 현상이 어찌 부산뿐일 테냐. 전주에서 순천으로 고속철이 뚫리면, 순천서 목포까지 전철화가 되면 서부간선망이 연결된 대량 장거리 수송 지대인 호남 내륙과 서해안 일대에 물류가 쏠리게 된다. 이 경우 대전의 연담화(conurbation) 고민은 엄살이다. 결국 철도 중심으로 바뀌는 물류 시스템 아래 부산과 서울로 이어지는 선분, 그 서쪽 역이 밤 하늘 불꽃처럼 화려하게 떠오를 것이다. 그 동쪽은 어둠 속으로 끝없이 잠겨갈 따름이고.
그러므로 고속철이 개통되는 4월이 오면, 그런 4월이 오면 강원도는 '여전히' 변방이다. 지난 수 백년 동안 그러했듯. 천지가 개벽하는 변화가 있어도 조금도 바뀌지 않았듯. 강원도는 '아직' 변방이다. 우리는 '오히려' 변방이다. 21 세기에 강원도는 아아, '더욱' 변방이다. 변두리 강원도의 안타깝고 답답한 이 상실, 이 지체(遲滯).
성을 담론하다가 생긴 약간의 불편한 심기에 더해 고속철 때문에 일어난 최근의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서울∼양양 간 고속도로 기공식은 결코 완화시켜 주지 못했다. '춘천 가는 길'까지 5 년이 걸릴 예정인 이 고속도로가, 태백산맥을 뚫고 양양에 안착하는 때가 언제일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이 고속도로가. 그 초라한 기공식까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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