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식 논설위원

 기존 지배 세력들이 투표를 통해 정치 중심에서 급격히 사라지고 새로운 메시지를 든 세대가 등장했다. 세계 정치의 전반적 상황과는 달리 언제나 오른 쪽으로 편향된 우리였기에 이 같은 정치적 중심 대이동은 우리를 지배해 온 정치사상의 혁명을 보는 느낌을 준다. 지난 2000년의 남아메리카를 볼 때 느끼던 바로 그 기분 같은.
 그 때 중남미는 좌파 물결이 거셌다. 브라질에서 루이스 룰라 다 실바(Lula da Silva) 노동자당(PT) 후보가 승리하더니, 그 여파인지 한 달 뒤 에콰도르 대선에서 중도좌파 루시오 구티에레스(Gutierrez)가 당선됐다. 이미 쿠바의 카스트로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에 대응해 반미(反美) '선(善)의 축'을 구축했다."며 기염을 토하고 있었고.
 그 시절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을 탄생시키며 좌파 성향을 맛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이동은 저만치 먼 곳에서 눈치만 볼 따름이었는데, 이번 총선에서 마침내 노동계가 국회로 진출한 것이다. 이런 일이 이렇게 빨리 오리라 그 누군들 상상이나 했을까.
 한 가지, 결코 무심히 넘길 수 없는 점은, 그러나 지금 서유럽이 우파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는 좌파 10 년 지배를 물리치고 우파 신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2000년 이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유럽 8 개국의 좌파는 우파에 연속적으로 패배했다. 2002년에 포르투갈마저 중도우파가 좌파 사회당의 장기 집권에 종지부를 찍었다.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아일랜드 스위스 아이슬란드 룩셈부르크가 우파 정권이 아닌가.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우린 어떠해야 한다는 얘긴가? 좌파로서 족하지 않다면 다시 우파로 가야 옳다는 건가? 우파가 오늘처럼 몰락한 뒤 몇 십 년 지나면 유럽에서 그러했듯 다시 우파가 일어선다는 것인가? 좌로 갔다가 다시 우로 가는, 그리고 다시 그 반대로 가는, 세계사 속의 이런 정치·이념적 사이클을 강조하자는 뜻인가?
 아니다. 말하고 싶은 것은, 기왕에 왼쪽으로 가게 됐다면 유럽을 잘 봐 두라는 것이다. 유럽의 좌파 정부가 어떻게 정책에서 승리하고 있는지, 유럽의 우파 국가들이 이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피라는 말이다. 그 한 예가 영국이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이라크 전쟁 이후 국내에서 인기가 날로 떨어지고 있다. 프랑스 좌파들은 블레어 노선을 '변형된 신보수주의'라며 조롱하고 있다. 블레어의 이념적 스승인 앤서니 기든스에게도 비웃음을 보낸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 프랑스의 중도좌파 논객들은 블레어의 노선에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왜 이러는가? 프랑스의 실업률이 19%대로 오를 때 영국 실업률이 5.1%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노동자 중 75%가 고용 안정을 느낀다 할 때 영국에서는 노동자의 85%가 안정감을 갖는다 했다. 우파 프랑스와 독일이 경제 성장 제로인 지금 좌파 영국은 연평균 2%대의 성장률을 유지한다는 게 이유다. 프랑스의 중도좌파 일간지 ‘르 몽드’의 경제 담당 칼럼리스트 에릭 르 부셰는 블레어의 노선에 "이것은 우파인가 좌파인가?"라고 물은 뒤, "아무튼 잘하고 있다."며 부러워하지 않았는가.
 전반적으로 한국의 정당은 한나라당이 조금 왼쪽으로 이동하고, 이에 발맞춰 열린우리당이 더 왼쪽으로, 그리고 민주노동당은 외연(外延)을 더 늘여 가야 할 때다. 그리해야 우리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다원화하는 방향으로 이동해 마침내 민주적 욕구를 억압한 그 지겨운 ‘지역 구도’가 완전히 해체되면서 진정한 의미의 정당 체제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노동계의 국회 진출은 만세 부를 쾌거다.
 그러나 만세를 부르면서 동시에 좌파를 모독할 욕구가 생긴다. 등원에 성공한 민주노동당은 왼쪽에 있으면서 그러나 일부 사안엔 좌파이길 포기하라. 토니 블레어가 그리했던 것처럼. 유럽 좌파는 분명 이념적으로 고장난 상태이며, 좌파의 담론은 자유주의 사상에 밀려난 처지다. 이런 ‘고장난 유럽 좌파를 따르라’는 모독적 모욕적 이율배반적 요구는 ‘투쟁적 극좌파의 등장’으로 우리 사회에 혼란이 생길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국 사회가 노동자·농민·서민 계층을 돌보는 진정한 좌파 사회를 맛보기도 전에 노동계의 등원을 후회하여 다음 선거에서 곧바로 우향우 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좌파 모독의 이 역설이야말로 한국적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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