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식 본보 논설위원

 내용을 따지기 전에 레토릭이 근사해 밑줄부터 긋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20 세기를 벗어나기 위하여'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러하다.“이데올로기가 포착하거나 합리화시킬 수 없는 모든 것은 말라비틀어지고, 부스러지고, 끝내는 지워진다. 이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그토록 무감각하고, 눈멀고, 귀먹고, 멍청한 존재로 만드는 이유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런 식의 비판적 이해에 관해, 분단 현실에 사는 우리로선 친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모랭이 얘기하는 공산주의적 이데올로기만이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독트린, 이론, 주의, 주장 따위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라 할 때, 일단 그 독트린, 이론, 주의, 주장 속에 빠져들면 다른 모든 것은 무가치하게 보인다. 이게 이데올로기의 가능성이요, 한계다.
 최근 행정수도 이전 정책은 많은 한국인에게, 특히 강원도 사람들에게 이데올로기를 사색하게 만든다. 즉, 충청권에 신행정수도를 건설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식의 태도에서 견고한 이데올로기적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대형 국책사업이 일단 방향을 정하고 추진되면 예의 다른 모든 목소리는 그 속에 함몰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무감각해지고, 눈멀고, 귀먹고, 멍청해진 당국은 그 자신과 함께 강원도의 이의, 저항, 거부의 몸짓 따위를 다만 말라비틀어지게, 부스러지게, 그리하여 끝내는 온전히 지워지게 할 것이다. 공공기관 이전 문제도 마찬가지다. '집단이전단지' 조성 외의 개별 기관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는 방침이라면, 원주뿐, 도내 다른 궁벽한 곳으로 어느 얼빠진 놈이 오겠는가.
 모랭의 얘기를 다시 좇는다.“이데올로기는 구조화된 시각을 제공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시각은 지구를 중심에, 코페르니쿠스의 시각은 태양 중심에 지구는 그 언저리에 위치시켰다. 사실 자료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이 말은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를 한 방에 날려 보낸 코페르니쿠스가 위대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세계란 제임스의 '다원주의', 막스 베버 식 '다신교적 바다'임에도, 곧 무수한 상대적 가치들의 혼돈 속에 존재함에도 하나의 독트린 또는 이데올로기가 세계의 틀을 하나로 규정하고 만다는 뜻이다.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분권, 균형 발전, 신행정수도, 유치, 이전 등을 시대적 화두로 끌어올린 이 정권의 생기 발랄함, 기발함, 선택의 탁월함을 인정하면서도, 최근 고속철처럼 남행(南行), 행정수도의 남하(南下), 미군부대의 남향(南向) 등이 하나의 틀로 규정됨으로써, 지난 반 세기 동안 외면 받아 이미 열등해져 버린 일부 지역을 세밀하고 따뜻하게 보살피지 않고, 마치 미국의 네오콘 모양 우아한 그러나 가공할 결론을 내려 버리는, 독트린적 이데올로기적 현실이 문제라는 것이다.
 정량적 분석 없이 무려 46조 원의 예산이 충청권으로 빨려 들어가면 심정적 패닉, 정서적 공황, 현실적 공동(空洞)이 돼 버릴 강원도는 정치·사회·경제적 중핵 지대의 곁다리로, 그 언저리에서 뻘개진 눈알을 굴리며 남쪽을 바라보게 될지 모른다. 수도권과 충청권 무대에서 일어나는 사건만이 사건으로 취급되며, 강원도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사건들이 사건도 아닌, 하찮은 일로 여겨질 것이다. 동계올림픽 유치 문제가 그냥 벌써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우리가 외치는 강원도 중심론(中心論)도 이 세상이 수도·충청권 중심(重心)이라는 사실의 반증에 다름 아니다.
 이 불쾌하고 가부장적인 이네들의 강고한 중앙적 독트린, 이론, 주의, 주장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딱딱하게 발기한, 여전한 이 20 세기 이데올로기를 21 세기적 유연한 이데올로기로 녹여 버려야 할 것이 아닌가. 다양한 새로운 이데올로기 중에 이 치 떨리는 강원도의 발육 부전을 치유할 아름다운 대항 독트린, 부드럽지만 거부할 수 없는 신(新)이데올로기는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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