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광 식 논설위원

 김선일 씨의 죽음은 우리에게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도대체 이런 죽음이 어디에 또 있는가. 이 경우 자살 따위는 얘기의 대상에 놓아두지 말자. 누구나 어린 시절에 또는 성장하면서 죽음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을 것이다. 예컨대 이웃 어른이 돌아가셨다든가, 일가친척 중 한 사람이, 너무나도 가까운 지인이, 친구나 형제가, 그리고 연인이나 육친이 죽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끓어오르는 슬픔을 참아내면서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지 않던가. 그러나 김선일 씨의 죽음을 맞은 이번엔 죽음에게 엄청난 비방을 쏟아 붓고 싶은 감정이 앞선다. 얼마나 애통스럽고 괴로운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함께 죽음에 대해 성찰이 아니라 엄청난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너 이놈, 죽음아, 그렇더라도 찾아오지 말 것을. 그런 참혹한 죽음은 결코 아닐 것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이 있다. 또 바리공주 전설엔 이승에서 저승을 가려면 '칼산 지옥' '화탕 지옥' '얼음 지옥' '혀 빼는 지옥' '독사 지옥' '암흑 지옥' 등 8만4천 개 지옥을 지나, 다시 높은 산을 넘고 험한 길을 걸어 끝없이 넓은 바다를 건너야 비로소 생명수가 있는 저승에 이른다고 한다. 생명수가 흐르는 저승이 그 너머에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지옥을 건너야 한다면 개똥밭에 구르는 이승에 그냥 이대로 머물고 싶다. 이 더러운 사대색신(四大色身)이야 어떻게 살든 늘 오탁악세(汚濁惡世)의 개똥밭 같은 이승에 굴러다니던 정말 보잘 것 없는 한 미물이 아니던가.
 죽음의 운명을 일찍이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이제 자신만의 고유한 죽음을 가지려는 소망은 점점 희귀해진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그런 죽음은 고유한 삶이나 마찬가지로 드물게 될 것이다." 이런 말에 넘어갔던 청춘 시절도 있었다. 그리하여 젊은 한때 어떤 죽음이 좋을까 하는 기특한 그러나 가당찮은 고뇌에 잠긴 적도 있었다. 아, 그러나 릴케여, 고유한 죽음이 아니라 먼저 고유한 삶을 말해야 하지 않았는가.
 법력 깊은 스님들은 죽음마저 마음대로 다룬다지. 몇 달 몇 년씩 눕지 않고 장좌불와(長坐不臥)하다가 앉거나 선 자세 그대로 육신의 옷을 벗는 '좌탈입망(坐脫入亡)'을 한다지. 작년에 서옹 스님이 정말 그렇게 열반에 드셨고, 한 단계 더 높이 달마, 혜가를 잇는 3조(祖) 승찬은 뜰을 거닐다가 나뭇가지를 잡은 채 임종했다지. 그러나 죽음을 초월한 듯한 이런 죽음조차 엄연한 사실은 그것이 결코 부정할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죽음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죽음아, 여하간 찾아오지 말았어야 할 것을.
 그러나 죽음은 이미 그를 죽였고, 우리는 그의 죽음이 너무나 슬픈 나머지 지금 죽음을 개탄하고 죽음을 처절하게 죽이고 싶은 심정이다. 절대타자의 죽음이 죽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님에도 이렇게 분노의 감정에 더하여 죽음 자체를 무화시키고 싶은 또 다른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그의 죽음이 대번에 우리 살아 있는 자에게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죽음이 산 자의 생을 향하여 갖가지 의미를 부여하려던 것처럼 그도 똑같이, 아니, 그는 더욱. "너는 무엇으로 죽어갈 것인가?"

 김선일 씨의 명복을 빈다. 고통과 슬픔에 빠져 있을 그의 가족에게도 진심어린 조의를 표한다.

이광식 논설위원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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