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식 논설위원

 사회학자 미헬스는 모든 조직은 과두화(寡頭化)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권력 핵심부의 몇몇 사람들에 의해 권력이 독점된다는 것이다. 소위 '실세'들이 마치 통뼈 모양 이익 있는 곳을 다 찾아다니며 실리를 챙긴다는 풍토 말이다.
 일례를 들면 선거전에서 승리를 쟁취한 클린턴팀이 권력을 맛보더니, 다음과 같은 짓을 했다. 붐비는 식당에 찾아가 자리를 내놓으라며 "우리는 백악관에서 왔다."고 호통쳤다. 대통령 측근이었던 에스피 농업장관은 애인을 데리고 프로풋볼 경기를 공짜로 보고, 기업체가 주선해 준 여행도 즐겼다.
 권력은 존재의 본질
 그러나 권력의 단맛에 취해 스스로 자제하지 못하면 제풀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 식당에서 소란을 피우던 예의 클린턴 정권의 젊은 실세들은 곧 "젊은 얼간이들(junior twits)"이라 불렸고, 에스피 농업장관은 즉각 자리에서 쫓겨났다.
 달콤하기도 하고, 이렇게 위험천만하기도 한 권력이 미국 민주 사회에서도 이런 정도로 일그러져 있으니, 지난 수십 년 간 지겹도록 보고 듣고 느껴 온 우리들의 그 추한 사건들을 굳이 들춰낼 필요 없을 터이다.
 이 권력이 지금 우리 사회 도처에 널려 있다. 중앙뿐 아니라 지방 정권의 집행부에도, 지방 의회에 특히 권력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얼마나 권력이 좋은지, 얼마나 권력에 취해 있는지 모든 의원이, 심지어 초선의원들까지 지방 의회 권력의 과두요 핵인 의장이 한번 돼 보겠다고 온통 난리다. 그리고 그 난리는 홍역 같은 진통과 혼란 속에 일부 끝나기도 했고 현재 진행중이기도 하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나 오스트리아 출신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말을 들이댈 것도 없이 어차피 권력은 '사회적 무의식'이고, '무의식적 욕망'의 산물이 아니던가.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말한 "권력은 존재의 본질"도 같은 맥락이다. 그 유명한 '권력에의 의지'도 거기서 나온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삶의 구석구석을 관통하고 있는 권력의 속성을 간파해 '생체 권력론'을 펼친 것도 비슷한 논거를 가지고 있다.
 학자들이 다들 이렇게 말하니, 권력이 인간 본질적 그 무엇이라는 것이 어렴풋이 깨달아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현실적으로 권력이 권위(權威)를 동반하지 않을 경우 인간 본질 또는 인간 욕망의 추악한 면을 드러내게 된다는 점이다. 자리의 성격상 특히 의회 의장이야말로 바로 그렇다. 그래서 영국은 하원 의장의 권위를 굳이 다음과 같은 관행을 통해 철저히 지키려 한다.
 
 권위 있는 의회 의장 돼야
 
  의원들이 의사당 안에서 의장을 만나면 반드시 경례한다. 개원식 때 지각하면 엄중히 경고한다. 열띤 토론으로 소란스러워지면 "질서를 지키시오." 이 한 마디에 쥐죽은 듯 조용해진다. 이를 어기면 의장의 명령으로 퇴장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표결 때 8분 내로 입장하지 않는 의원의 투표권은 의장 직권으로 박탈당한다.
 특히 이들의 다음과 같은 의장직 수락 의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장에 선출됐음에도 동료 의원의 손에 끌려 몇 번 거절하다가 마지못한 듯이 의장 자리에 올라앉는다.
 영국에서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이 "하겠다"나 "되고 싶다"가 아니라 '다수가 추대하는 사람'이 의장이 된다는 형식을 갖춰 보자는 것이다. 이런 의식이나 형식에 의해 자연스럽게 의장의 권위가 찾아지고, 그리하여 의장은 당연히 스스로 통제된, 악에 물들지 않는, 속되지 않고, 저급하지 않고, 타락하지 않으면서 고귀하게 지켜지는, 권위를 수반하는 권력의 자리로 굳게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집행부의 정책에 대해 가부 동수이면 의장은 마땅히 반대에 표를 던진다. 이렇게 늘 집행부와 의회가 건강하게 대립하는 구도로 가져가려고 노력하는 자리가 의회 의장이다. 단순한 권한이나 권력을 행사하는 격이 낮고 천박한 자리가 결코 아닌 것이다. 후반기 의장 선거가 끝나가는 즈음, 신임 의장과 의장단 그리고 의원 모두 한번쯤 이를 깊이 새겨볼 만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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