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상 수 논설위원

 사람들은 늘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지만, 다시 그 일상을 그리워한다. 때로 한 치의 빈틈없이 돌아오는 일상에 대해 못견뎌 하며, 일탈을 도모한다. 어느 가정에선가, 오늘도 가장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출근시간을 맞추기 위해 허겁지겁 현관을 나설테고, 아내는 그보다 더 바쁜 마음으로 가장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의 등교길을 재촉할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은 가장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그들의 일과를 보내게 될 것이다. 오후가 되면 아이들이 먼저 책가방을 집어 던지며 귀가를 알릴 것이다. 남편은 또 언제나처럼 그 시간에 적당히 지치고 후줄근해진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이 일상이 지겨워질 때 쯤 주말이 돌아오고, 그들에게 주어진 이 작은 일탈과 이완, 완상의 시간을 통해 일상의 지겨움을 견뎌내는 에너지와 위안을 얻게 된다. 사람들은 때로 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주어지는 일상의 평화를 지겨워 한다. 그리고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이 따분한 평화에도 언젠가 불가항력에 의한 파괴와 재편이 오기를 음모처럼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이토록 따분한 개인의 일상은 가정의 일상을 만들고, 가정의 일상은 다시 사회의 일상을 만들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원천이 된다. 그리고 그 일상은 다시 사회를 향해, 세상을 향해,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도전하고 성취하는 토양이 되는 것임을, 그러나 일상은 일깨워 주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가. 이처럼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생각 속의 자유를 누리는 것은 물론, 따분하고 지겨워해야 할 자유조차 주지 않고 팍팍하게 돌아가는 게 '요즘세상'이다. 정치는 정치대로, 경제는 경제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따로 놀고 헛돌며 뒤엉키는 형국이다. 그리하여 이 지겹고 따분한 일상의 평화를 향유할 자유마저 빼앗아가는 것이 요즘 세태다. 구악을 벗어 던지고 상생의 정치를 펴겠다고 공언했던 정치권은 차거운 맹세와 더불어 천막촌으로, 시장통으로 달려갔으나 그들의 약속은 3일을 넘기기 어렵다. 국민의 심사를 담금질이라도 하려는 듯 그 의도와 지향을 알 수 없는 오기와 결사항전의 의지만 속절없이 불태우고 있다. 신행정수도 이전, 공공기관의 지방이전, 분권과 분산정책, 자충과 혼선이 되풀이되는 듯한 국방문제 등 어느 하나 가볍지 않은 국사건만 여야의 대좌 소식은 없고 속보이는 사생결단의 구호만 요란하다. 경제와 사회는 작당이라도 한 듯 양극으로 치닫고 분열과 갈등의 눈을 키우고 있다. 경제는 장기 침체 속에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빈익빈 부익부 악순환의 매듭은 점점 더 조여지고 있다. 도무지 사회의 총체적 반영이라 할 주가도 답답한 박스권을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전도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세상은 어떤가. 20명이 넘은 생명을 앗아간 연쇄살인이 태연히 저질러지고, 사람의 목을 베는 참수의 뉴스를 일상으로 접해야하는 이 광포한 시대가 또 사람들의 일상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있다. 엊그제 북한주민 400여명이 동남아의 제3국을 경유해 집단입국한 뉴스는 곧 이어질 북으로부터의 엑소더스 예고편 같기만 하다. 이 소모적인 논쟁과 수렴되지 않는 국론, 반사회·반문명적 사건, 결론 없이 습관처럼 되풀이하는 거대담론이 지겹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제 그토록 지겨워했던 일상으로 다만 돌아가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잘 알려진 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s)를 다시 들춰보자. 온갖 물질적 허식을 버리고 최소한의 필수품만으로 사는 자연상태야 말로 최고의 행복이라고 주장하며 길거리에서 잠을 자고 통 속을 집 삼아 사는 그 였다. 어느 날 통 속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찾아와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겠다. 통 속의 디오게네스의 대답은 다만 '내게 그늘이 지지 않도록 비켜 달라'는 것이었다. 햇볕을 쬘 수 있는 일상의 그 소중한 행복을 가로막지 말라는 것이었겠다. 철학적 일탈과 반문명적 삶을 지향했던 디오게네스와는 처지나 입장이 같지 않겠으나 일상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의 절박함이 그때 그만 못할까. 국민에게 일상을 돌려주는 정치, 따분함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정치가 그립다. 디오게네스가 말했던 '햇볕을 쬘 자유'를 달라는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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