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광 식 논설위원

 감히 '정념(正念)'이다. 오대산 월정사 주지 스님의 법명이 '정념'이다. 한 스님을 부르는 '정념'이란 무슨 뜻을 담고 있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대체로 다음 4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모든 생명체의 삶이 괴로운 것(苦)이라는 가르침이고, 둘째는 괴로움의 원인(集)인 번뇌에 대한 가르침이며, 셋째는 번뇌를 없앨 때 만나게 되는 열반(滅)에 대한 가르침이고, 넷째는 실천해야 할 8 가지 올바른 길(道)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고집멸도'를 '4 가지 성스러운 가르침'이라는 의미에서 사성제(四聖諦)라 부른다.
 사성제 중 네 번째 '8 가지 올바른 길'을 특히 '팔정도(八正道)'라 하는데,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올바른 세계관으로 정견(正見)이요, 둘째는 올바른 생각인 정사(正思), 셋째 올바른 말인 정어(正語), 넷째 올바른 행위 정업(正業), 다섯째는 올바른 생활 정명(正命), 여섯째는 올바른 노력인 정정진(正精進)이고, 여덟 번째는 올바른 삼매라는 정정(正定)인데, 그 일곱 번째가 바로 '올바른 마음 단속'이라는 의미의 '정념(正念)'이다. 그러므로 '정념'이란 사실 얼마나 거대 거창한 이름인가.
 오대산 월정사 정념 주지 스님은 '올바른 마음 단속'이라는 팔정도의 일곱 번째 명제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살 운명을 스스로 짊어졌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정념'이란 세속적 향락을 멀리 하는 이른바 출리심(出離心) 또는 염리심(厭離心)의 그 끊임없는 수행 혹은 용맹정진 그리고 그것의 천명(闡明)이 아니겠는가. 그럴 결심이 없고서야 어찌 '정념'을 법명으로 삼았겠는가. 사실 이런 유의 저급한 파악은 그를 얼마나 욕되게 할 것인가. 이런 따위의 이해를 훨씬 넘어선 곳에 맑고 굳은 세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할 터인데.
 이런 차원에서 정념 주지 스님이 이끄는 오대산 월정사의 최근의 활동은 주목할 만하다. 경건하고 환희로운 산사 축제를 연 시점에서 특히 그렇다. 요즘 화사한 산사 축제가 도처에서 열려 출세간에 화제가 아니던가. 사부대중이 내남없이 한 마당에 모여 부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무차법회 같은 행사 말이다. 그러나 오대산 월정사에서 열린 산사 축제는 그 마지막 단계에서 '불교 문화재 활성화 세미나'를 개최함으로써 다른 곳의 산사 축제와 차별됐다.
 그 날 세미나는 그윽한 시간에 열렸다. 상형하여 말하자면, 해가 풀숲 속으로 조용히 가라앉는 묘연(杳然)한 시간에 말이다. 참여자 모두가 선방 방석 위에 흔들림 없이 앉아 열띤 토론을 벌이거나 경청했다. 혹자는 불사(佛事)의 크기를 비판했고, 혹자는 사문에 남은 권위주의에 의문을 품었다. 비구는 성찰했으며, 비구니는 침을 삼켰다. 또 불교 철학을 강의하던 우바새는 "불상이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를, 그리하여 인류의 상생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우바새는 "팔각구층탑이 없다면 사중이 어찌 월정사에 모이겠는가." 하며 수행처 외형의 아름다움으로 반론했다. 이념과 형상의 논쟁이다. 섭론·유식학과 밀교의 부딪침이다. 그 때 몇 우바이들은 거대한 화엄의 세계를 떠올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모두 다 무엇인가? '올바른 마음 단속'을 하자는 것이다. '정념'하자는 것이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넘어 모든 생명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계속 떠올리는 수행을 오대산 월정사에서부터, 바로 지금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오대산 월정사 정념 주지 스님은 축제를 열고 사중을 그렇게 불러 모은 것이다.
 가을 오대산에서 축제가 열리는 며칠 동안 수천수만의 사중을 만나 지칠 만한데도 정념 주지 스님은 "자주 놀러 오세요." 하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산사는 석양을 받으며 그렇게 번뇌의 불길을 훅 꺼버리는 깨달음의 열반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광식 논설위원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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