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식 논설위원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달 미국 LA의 국제관계협의회(WAC) 주최 오찬에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외부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리 있는 측면이 있다"는 발언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이후 지난 달포 동안 그야말로 대양을 건너뛰며 현란한 언어를 구사해 왔다. 왕년의 미국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이 "진정 나는 대통령 직이 지겹다"고 고백한 이후 처음 듣는 소리였던 "대통령 못해 먹겠다"던 때와는 사뭇 다른, 노대통령의 달변이 회복된 양상이다.
 그 현란한 발언 중 기억될 것은 영국에서 폴란드를 거쳐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것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품위 있는 삶이 중요하다"거나, 그리하여 "우리도 좀 품위 있게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은 영국에서 빈객 대접을 받은 뒤의 '유럽예찬'쯤으로 해석해도 좋겠다.
 특히 신경 쓰이는 대목은 "미국식 경쟁지상주의는 한계"라거나, "프랑스에 대해 우리가 보다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프랑스 문화가 미국과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는 점 때문"이란 언급이다. 비교 평가 방식이 기본적으로 문제이고, 또 "섭섭해 할 친구도 있겠지만 친구를 독점하려 해선 안 된다"고 한 부분에 이르러선 '악의 축'이란 말을 만들어낸 데이비드 프럼을 비롯한 딕 체니 부통령 중심 미국 정부 네오콘 그룹의 '섭섭함'에서 나올 태도도 신경 쓰인다.
 따라서 네오콘 무시 발언으로 프랑스를 세워준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가 세계 정치 지형도를 바꿀 만큼의 지명도를 가졌는지 묻게 된다. 우리는 아직 세계열강에 이른바 밴드왜거닝(Bandwagoning·편승) 해야 할 국가로 분류될 따름이지 않던가. 네오콘이나 부시가 두렵다는 얘기가 아니라, 대통령 사이의 친분이 뜻밖에 힘이 되는 수가 있기에, 쌓아 놓은 정리를 굳이 흔들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물음이다.
 클린턴과 블레어는 옥스퍼드 동문이고, 또 진보정당이면서 중도노선으로 선거에 이겼으며, 선거 뒤 정치 자금설에 말려 고생한 것도 같아 매우 친해져 당시 미영 간에 분위기가 좋았다. 처칠과 루스벨트 때 절정이었던 영미 사이가 수에즈 전쟁 때, 아이젠하워가 영국을 돕지 않아 서먹해진 것을 케네디와 맥밀런이 집권하면서 다시 친해지고, 뒷날 레이건과 대처의 친분으로 이어지게 됨으로써 양국이 협력 번영했다.
 국가 정상 간 친해져 손해 볼 것이 없다. 예의 영미 관계란 물론 문화적 인종적 친밀성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다른 한 측면은 두 나라 정상들이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신뢰의 공적이 크다. 노무현 대통령의 해외 발언은 삶의 품격을 논한 프랑스 교민들과의 간담회 때를 제외하곤 매우 정치적, 아니 기왕의 친분을 훼손할 만큼 지나치게 정치적이었다.
 '6자회담에 응하라'는 대북 최후통첩 용이란 해석이나, 북한을 다루는 방식을 미국에 가르치려 했다는 분석 속에서도, 어찌 됐든 한 나라를 칭송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상처 준 것은 높은 수준의 외교라 평하기 어렵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귀국 길에 자이툰 부대를 전격 방문한 것이다. 말하자면 노무현식 정곡 찌르기인데, 이로써 미국이 느낄 '섭섭함'이 해소됐을까?
 중국이 무서운 속도로 강대국이 돼 가고, 일본의 우향우는 이미 되돌릴 수 없다. 중국에 의해 고구려는 초토화로, 중국인들에 의해 한국은 벤치마킹 대상에서 제외됐다. 일본의 한류는 찻잔 속의 태풍 모양 중년여성 층에서의 그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듣는 워싱톤 외교가의 "노 대통령의 강한 발언은 국내를 겨냥한 것이 많다"라는 엄청난 양보적 해석은 다만 잠정적 해피엔딩으로 보일 따름이다.
 한 해의 끝에 즈음하여 세계가 대한민국과 점점 멀어져 가는 느낌에 휩싸인다. 그러므로 나는 비극론자인가?
  이광식 논설위원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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