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체주의자의 기우

 연전에 '해체주의'라는 매우 어렵고도 예민한 철학을 논한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작고했다.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그 데리다가 주장하는 '해체(deconstruction)'란 무엇인가? 기존의 모든 것을 왕창 해체해 버리자는 주장인가? 아닌가? 전적으로 아닌가? 전적으로 아닌 것은 아닌가? 정말 알쏭달쏭하다.
 억지로 간단히 설명하면, 해체주의란 '정전화(定典化)된 텍스트를 통해 로고스(Logos)로 군림하며 권력을 행사하는 어떤 관념들을 비판하고 해체하자'는 생각이다. 쉽게 말하면, 문자로 기록된 그 무엇에서 '이성'이니 '본질'이니 '근원적 말씀'이니 하는 것을 찾아내자는 이른바 '로고스중심주의'를 거부하자는 것이다.
 결국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예를 들면,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을 때에, 이 책이 리카도의 글, 아담 스미스의 견해, 헤겔의 관념론, 그리고 19세기 공산주의의 개념들로 가득 차 있지, 어떤 '단일한 본질'이 있다고 보지 말자는 태도다. 또 읽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여건에 따라 아주 다르게 읽힌다는 사실이 '해체'가 개입할 자리라는 것이다.
 이런 해체주의 편에 서서 "춘천 없이 평창 없다"를 읽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읽을 것이다. 이것은 도청 앞에 붙은 대형 현수막에서 수부도시 춘천이 갖는 권력 또는 춘천을 억압하는 어떤 권력을, 또 평창이 처한 특수 상황이나 평창을 아래로 보는 어떤 관념을 찾아내자는 식으로 읽지 않겠다는 말이다.
 근본적으로 로고스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문자의 해악을 뛰어넘어, 오독(誤讀) 혹은 오독(汚讀)을 넘어서서, 현수막을 내다 건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믿고 있는 '로고스의 현현' 의식을 비켜서서, 전적으로 '전혀 의도하지 않은 어떤 것이 말해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해체주의의 입장에 서서 나는 그 글을 읽으려 한다. 해체주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그 '사이'와 '균열'에 서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 예를 보이면 이렇다. 그 대형 현수막의 글귀는 춘천과 평창이 결국 하나라는 것이다. 일의대수라는 것이다. 강원도라는 공간에서 결국 한 몸일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춘천 없이 평창 없다'는 즉각 '평창 없이 춘천 없다'는 환치를 떠올린다. 상식에 기초한 내 의식의 이 즉각적 치환이 바로 두 지역이 하나임을 증거한다고 본다.
 또 하나, 대형 현수막이 도청 앞 도로 위에 걸렸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참고하면, 춘천의 문제와 동시에 평창의 문제 또한 오늘날 강원도가 해결해야 할 중대 현안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평창 위상의 급격한 상승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이 경우 글을 쓴 사람들의 의지와는 별개로 평창 문제의 중대성을 논하려고 춘천이 동원됐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이성과 합리성만을 내세운 로고스중심주의를 탈피하여 텍스트 사이에 서서 새로운 의도를 규명해 보려는, 한 저급한 예로서의 이런 시도를 나는 대형 현수막처럼 높이 내다 건다. 왜 이러는가? 갈등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끼리의 길항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해체주의적으로 읽지 않을 경우 자칫 일어날 흥분을 염려하여.
 굳이 연전에 작고한 저쪽 나라 철학자 자크 데리다를 내세운 까닭이야 내 개인적 기호일 따름이다. 실은 해체주의자 자크 데리다의 죽음이 내 삶 속에서 그리 심각하게 임팩트 되지는 않았다. 서정주 시인과 김춘수 시인의 죽음에 비해 그렇다. 그러나 때론 그를 불러내 고정 관념을 밀어내고 의미의 산포(散布) 산종(散種)을 시도하여 혹 일어날지 모를 사안 사이의 긴장 관계를 해체해 보는 방식도 유용하다고 믿는다.
 강원도가 서 있는 오늘의 상황이 워낙 중대하고 민감하기에.
 이광식 논설위원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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