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낙산사지(址)에 서서

 인도에 '보타락가산(寶陀洛伽山)'이 있는데, 이에서 나온 이름이 여기 검게 그을은 양양의 '낙산(洛山)'이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에 먼저 의상(義湘)이, 뒤이어 원효(元曉)가 이 낙산에 찾아온다.
 낙산이 도대체 어떤 산이기에 그 유명한 분들이 앞 다퉈 찾아왔는가? 까닭은 이렇다.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있다고 믿는 것처럼 불자들은 양양의 낙산에 관음보살이 상주한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므로 이유는 간단하다. 의상과 원효는 관음보살을 직접 만나보려고 낙산에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의상은 관음을 보았을까? 중국 유학파인 의상은 낙산 저 아래 바닷가 굴 속 지금의 홍련암 자리에서 관음보살을 만났을 뿐만 아니라 "그대가 앉아 있는 자리 위쪽 산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이 솟아날 것이니 거기에다 전각을 지으라."는 명을 받고 절을 세우게 되는데, 그게 바로 낙산사(洛山寺)다.
 원효에겐 세 가지 희한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 원효가 추수하는 한 여인을 만나 벼를 달라고 하자 여인은 벼가 쭉정이라고 대답한다. 둘, 월경 서답을 빨고 있는 여인에게 물을 청하자 바로 그 더러운 물을 주기에 버리고 새 물을 떠서 마신다. 셋, 파랑새가 "제호 화상은 단념하라." 란 말을 남기고 사라진 소나무 밑에서 발견한 신발 한 짝을 낙산사 관음상 아래에서 다시 보게 된다. 그제서야 여인이나 파랑새가 바로 관음이었음을 깨닫게 되지만, 원효는 끝내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보지 못한다.
 이에 대한 후학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의상이 상층·소승적이요 원효가 민중·대승적이라거나, 결국 두 분 다 관음의 존재를 깨달은 것이라 한 것들이 그러하다. 누가 더 나은가 하는 식의 물음은 이 경우 별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외람되다.
 따라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의상은 계속 가고, 해골 물을 마신 원효는 중도 포기했다는, 동학(同學) 도반(道伴)이 서로 다른 선택을 한 일화를 두고 '길을 돌이킨 원효도 약여(躍如)하지만, 초지(初志)를 바꾸지 않은 의상 역시 장하다.'고 평한 민영규 선생처럼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의상은 이 땅에 관음신앙을 세웠으며, 원효는 그를 좇아 확인 증명 증거하고 있으므로 두 분 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는 것이다.
 오늘, 검은 '낙산사지(址)'에 서서 이 두 분을 추억하고 보니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어찌 진실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앞서거니 뒤 좇거니 이들의 치열한 구도의 열정을, 눈 빛 붉어지는 조선 정신사의 현장을 이렇게 폐허, 한 줌의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으니.
 의상이 관음으로부터 받은 염주와 동해 용에게 받았다는 여의주가 칠층석탑에 보관돼 있을 거라는데, 훼손이 염려된다. 원통보전 아, 관음의 방. 이게 연기돼 사라졌으니 어떡하고, 관음의 집을 에우던 아름다운 원담이 그을려 어떡하나. 원효를 희롱한 관음의 화신 파랑새는 어디로 날아갔나. 고개를 들어 그을은 소나무를 바라본다. 어디에 살아 있기나 하나?
 파랑새를 찾기는커녕, 관음을 만나기는커녕, 번뇌를 깨뜨리기는커녕, 낙산에 올라 낙산사 백화도량 그 깊디 깊은 관음의 무외심(無畏心)의 바다에 풍덩 빠져 마침내 깨치기는커녕 지금 우리는 분명 무엇에겐가 혼백을 빼앗기고, 넋을 놓고 있다. 온 세상에다가 생중계를 해대며 낙산사를 불태우다니. 덕산방(德山棒)을 호되게 내리쳐 오히려 부족한 이 타락 오판 안일 방심 해이 나타 방기 방자…. 문화 문명 역사에 너무나도 오만무례한 우리는 지금 도대체 무엇에다 정신 팔고 있나!
이광식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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