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이 100년 전 이내 건축물 208건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철원 '북한 노동당사'와 '승일교'를 함께 지정한 전향적 발상은 박수를 받을 만 하다. 이 두 건축물이 자칫 이념대립의 결과물 정도로 무시돼 영원히 방치될 뻔하던 위기에서 구제됐기 때문이다. 두 건축물은 북한에 의해 설계된 '북한 건축'이기 때문에 마치 전쟁 노획물처럼 취급되거나 그렇게 보려는 시각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들 건축물이 해방공간과 6·25전쟁 기간에 지어진 건축물이라는 역사성과 당시의 북한사람들의 생각과 기술력을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라는 자료적 가치 때문에 보전대책이 끊임없이 요구돼 온 것도 사실이다. 문화재청은 바로 이 후자의 요구에 귀를 기울인 것 같다. 그동안 이 두 건축물이 거의 방치되다 시피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사람들이 많았다. 이번 문화재 지정은 그런 갈증을 해소시킨 것은 물론이고, 우리의 문화적 깊은 안목을 새삼 발견하는 기쁨도 갖게 하고 있다.

이젠 잘 보전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그렇게 하자면 무엇 때문에 잘 보전해야 하는지를 설명할 보전 동기가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이 두 건축물은 보전가치를 설명할 자료가 너무 빈약하다. 노동당사는 1946년 초 착공해 그해 연말에 완공한 연건평 570평, 지상 3층의 무근 콘크리트 벽돌조 건물로 부분적으로 러시아식 건축양식 도입된 것이 특징이다. 규모가 클 뿐 아니라 당시 기술력의 백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설계도는 물론이고, 설계자가 누구인지 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각 동네에서 쌀 200가마씩을 출연하고, 노동력을 동원하는 재정수탈을 해 지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지만, 분단상황을 전제로 해 밝혀낸 이런 조사자료들은 객관성이 떨어지고 있다. 승일교도 자료가 빈약하긴 마찬가지다. 향토사학자 김영배(金暎培)씨 등에 의해 설계자가 당시 철원농업전문학교 교사 김명여(金明呂)로 주장되고 있지만, 확증은 없으며 역시 설계도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48년 북한이 착공했으나 6·25 전쟁으로 중단된 것을 남한이 마저 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를 증명할 만한 자료도 사실상 없다.

한낱 전쟁유적에서 문화재로 '승격'된 이상, 이제 이들 건축물은 발굴될 것은 더 발굴돼야 하고, 찾아야할 자료는 더 찾아내야 한다. 역시 전쟁유적인 철원제일감리교회의 설계도를 한 건축학자가 최근 일본의 오사카 예술대학에서 찾아낸 것처럼, 불과 반세기 역사에 불과한 두 건축물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다리 이름이 '한탄교'에서 한글 이름 '승일교'로 바뀌었다가, 85년 10월 1일 군부에 의해 한 군인의 이름 따 '昇日橋'로 바뀌게 된 유래도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 기대하던 대로 지역에 또 하나 문화자원을 갖게됐다. 그만큼 이를 제대로 지켜갈 일거리도 하나 더 늘었다는 자세로 두 문화재를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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