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식 본사 논설위원

 '일성록'은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와 더불어 조선시대 대표적 관찬 사서(官撰史書) 중 하나다. 이 '일성록'의 조선 정조 원년 정유년, 1777년 5월 5일 기사에 이런 장면이 보인다. "연복(練服)을 갖춰 입고 재실을 나와 효명전에 나아가 엎드려 곡(哭)하자 자리에 있던 자들이 모두 곡하였다." 정조 임금이 효명전에 나아가 단오제를 행했다는 내용이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보자. 고종 2년 을축, 1865년 5월 2일. "김태욱이 이조(吏曹)의 말로 아뢰기를, 단오제의 제관(祭官)을 마련해 둬야 합니다." 이에 고종이 "60 세 이상인 자로 융통하라" 하고 윤허한다. 보다 앞서 1531년에 "이조 좌랑에게 단오제 제문을 짓게 하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들 모두 제의 형식으로 궁중에서 단오제를 중요하게 다루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숭고한 장면만 있는 게 아니다. 조선 후기 속화(俗畵)가 유행될 때, 민중을 그린 김홍도와 쌍벽을 이룬 신윤복은 주로 양반의 풍류 남녀 간의 애정을 섬세한 필치로 묘사하지 않았나. 그 중 하나에 '단오풍정'이 있다. 단옷날 시냇가에서 머리를 감는 여인들과 그 모습을 훔쳐보던 젊은이가 색정을 부추기던 그 매력 넘치는 그림.
 단오란 이렇게 다양한 모양새로 지금까지 우리 곁에서 우리를 흥분케 하고, 우리를 자랑스럽게 하고, 때론 숭고하게, 때론 풀어져 흔들거리게 하면서 우리의 삶을 윤기 있게 했다. 지금까지 천년 동안을. 아니, 예(濊)의 무천부터 몇 천 년을 이어 왔을지 모른다. 적어도 강릉지역에서는.
 유네스코에서 1978년 미쉘 올립(Michel Olyff)이 인류의 소중한 문화 및 자연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세계문화유산'을 지정하자는 제의로 시작된 일이 1997년 무형문화재에 이르기까지 확대돼 대한민국 것으론 '종묘제례악'과 '판소리'에 이어 엊그제 '강릉단오제'가 등록됐다.
 어린 시절에 경험한 단오제. 조금은 으스스한 분위기의 무당들이 신기를 뿜으며 춤을 추고, 노인네들이 남대천 단양제 제단 아래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않고 며칠 내내 함께 먹고 자던 장면, 그건 숭엄한 제의라기보다 즐거운 축제였다. 이제 난장과 부속 행사, 특히 가벼운 변종 문화에 밀려 이런 원형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사실 근본적으로 강릉단오제를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키려 한 이유는 이것이다. 원형의 상실, 그것은 우리 전통문화 본질 상실의 위기이므로.
 이와 동시에 지금 이 시간 사실 진실로 놀라게 되는 것은 이런 염려를 한방에 날려 버린 강릉시민의 그 글로벌한 방식이다. 지구촌의 한 골짜기에서 이루어지던 지방적 축제를 어떻게 세계인의 축제, 인류의 한 유산으로 남기길 바라게 됐는가? 감히 어찌 그런 욕망과 의욕을 불태우게 됐는가? 세계의 주변을 어떻게 대번에 세계사의 중핵으로 뛰어 오르게 했는가?
 문화 다양성을 외면하고 소수 문화를 절멸시키려 들며 문화 지배 세력으로 나서려는 미국 등 문화 제국주의와 이웃나라의 '동북공정' 또는 '단오 딴지'를 밀어내고 이리도 단호하고도 과감하게 도전하여,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랄한 야유를 던지듯 이렇게 통쾌한 승리를 쟁취했는가? 삶과 죽음의 리얼리즘을 시종일관 구현해내는 한국적 12 굿판을 어떻게 이렇게 철저히 인류사의 중심에 올려놓으려는 의도를 성공시켰는가?
 아아, 자랑스러워라, 강릉 사람들! 강원도 사람들!

이광식 논설위원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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