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식 논설위원

 영웅은 이미 없다. 18 세기는 철학과 사상의 세기였고, 19 세기는 소설과 낭만의 시대였다. 20 세기는 무엇이었을까? 비(非)이성과 광란의 세기였다. 그런 세기에 영웅이 탄생될 리 없다. 이미 영웅은 신화시대가 지나간 이후 낭만주의 시대에 잠시 기다려 보았음에도 나타나지 않고, 오늘날 마침내 사라졌다. 그랬으므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영웅을 기다리지 않는다.
 한 때 우리는 괴물에 끌려가 위기에 처한 공주를 구하거나 권력 아래 고통 받는 빈민을 구제하고 드디어 새 나라를 건설하는 그야말로 신적인 영웅, 위대한 건국의 영웅을 한 번만, 정말 한 번만 더 보고 싶어 했지만, 결코 그런 영웅은 찾아오지 않았다.
 이제 다시 좀 낮은 층위의 영웅, 즉 '대중 영웅'을 우리는 스스로 휴지력(休止力)을 기르며 기다려 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나타난 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길 요구하면서 이른바 '대중 독재'에 의해 탄생한 '대중 영웅'이었다. 권력 의지와 스펙터클을 갈망하는 대중의 요구에 응해 대중 영웅은 마르크시즘과 파시즘이 인류사의 들판을 뛰어다니던 시절에 폭력을 이끌다가 황망히 가버렸고, 자유 시장이 자본을 앞세워 인간 정신을 광포하게 휘젓고 다니는 오늘날 몇 대중 영웅은 영상 속에서 저 혼자 춤을 추고 있을 따름이다.
 한 마디로 이제 영웅은 완벽히 사라지고 말았으며, 다시 나타날 기미도 기회도 계제도 보이지 않고, 없고, 아니게 됐다. 그랬으므로 우리는 다만 '원로(元老)'에 목마를 따름이다. '장로(長老)'를 찾아 나설 뿐이다. 어디에 '어르신'이 없는지, 아니 어디에 '어른'이 살아계시는지 묻고 또 물으면서, 산을 오르고 골을 뒤지며, 언덕을 넘고 강을 건너 어디엔가 분명 홀로 좌정해 계실 원로를 소리치고 찾아다녀야 할 판이다.
 옛날에 우물에 호랑이 한 마리가 빠졌다. 구경꾼들이 모여들고 언제 뛰어나올지 몰라 경계가 삼엄했다. 현감은 고민 끝에 단안을 내렸다. 멍석으로 우물을 덮고 구멍을 뚫어 포수로 하여금 총을 쏴 죽였다. 문제는 사살 후에 일어났다. 호랑이는 호피뿐 아니라 수염 발톱까지 버릴 것 하나 없는 귀물이다. 우물 주인이 우리 우물에 빠졌으니 내 것이라 주장했고, 현감은 내가 다스리는 땅에서 잡았으니 내 것이라고 우겼다.
 결판이 나지 않자 그 고을에서 신망이 높은 참봉 출신의 원로 어른에게 판결을 의뢰했다. 그 어른은 자기가 내린 결정에 따를 것을 양측에 다짐받고 호피는 현감에게, 호피 외의 모든 것은 우물 주인의 소유로 판결을 내렸고, 이 판결은 명 판결로 이렇게 지금도 구전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주목해야 하나? 예전엔 이렇게 웬만한 민사나 형사 사건 등 송사는 그 마을의 원로에게 의뢰하여 처리하는 것이 우리의 전통 관행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옛 촌락자치제의 헌법이라 할 '향약(鄕約)'은 삼노인(三老人)이라 하여 70 세 넘은 노인과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나 벼슬한 사람으로 마을의 민사 형사를 결정하게 하고 도덕과 풍기를 다스리게 했다. '구약성서'에도 아버지의 분부를 어긴 아들을 마을 어르신에게 데려가 처단케 하고,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부족의 큰일은 어르신 70 명이 모여 의논해 결정했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혁신도시가 피를 부르고 있다. '학자적 양심'은 길바닥에 혓바닥을 빼어물고 죽어 자빠졌으며, 정부는 눈을 외로 꼬고 휘파람만 불어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테면 도백은 사면초가요, 말하자면 현감들은 앙앙불락 형국인데 찾아가 그 해결책을 물을 원로가 없다. 우리는 어찌하여 위기에 대비하여 원로를 세우지 않았나? 나이 벼슬 덕망 다 높은 인물이 세상에 그리도 흔한데 어찌하여 원로가 없는가. 다가가 무릎 꿇고 여쭈어볼 어른 어르신 장로가 어디에도 보이지 아니하니 아, 어찌 이토록 우리는 가난한 백성이던가! 희망을 가슴 가득 안아야 할 이 새해에, 아무도 없어 황량하고 궁벽한 강원도의 새해 벽두에….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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