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평야에 마지막 논에 모내기를 하는 것을 농민들은 "뚜껑이 덮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한 해 농사가 무난할 전망이라는 농민들의 확신이 담겨 있는 것이다. 예년 같으면 철원평야는 이미 뚜껑이 덮였을 때다. 그러나 올해 철원평야는 농민들이 그런 확신을 갖기에는 비관적이다. 수치상으로는 1만80㏊ 가운데 97%의 논에 모내기를 끝내 334㏊ 정도만 빈 논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이미 모내기를 한 논조차 사상 최악의 가뭄 앞에서 타들어 가고 있다 것이다. 갈라진 논바닥에서 어린 모가 타 죽고 있는 상황이라면, 올 철원평야의 농사는 지금 얼마만큼 모내기를 마쳤다는 통계수치만으로 앞날을 점칠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 주말 이한동(李漢東) 총리가 이런 가뭄현장을 살펴보고 돌아갔다. 올 봄 가뭄은 인위적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하늘이 도와 줘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총리의 이번 시찰은 마치 정부까지도 하늘만 탓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남겨 놓았다.

우선 "한해대책 추가예산을 확보하겠다"는 부분이다. 정부는 지난 21일 당정협의회를 열어 가뭄지역에 추가로 1백63억 원을 지원키로 했다. 당시 농림부측은 "이미 확보된 가뭄대책 예산을 지원해 간이용수원을 추가로 개발할 계획"이라고 보고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정부의 가뭄 대책은 아직도 탁상에서만 수립되고 있다는 얘기인데, 언제 현장에 그 돈이 내려온다는 말인가. 가뭄 대책비는 예산이 적기에 배분돼야 예산집행의 실효성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철원평야에서는 관정 60 곳을 뚫고도 전기를 못 대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농민들은 한나절 볕이면 모가 하얗게 타죽는 판에 그런 작은 일부터 즉석에서 풀어주는 것이 정말 갈라진 논바닥에 '물 한 방울'같은 시찰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뭄 현장으로 가는 총리에게 쏠렸던 농민들의 시선 가운데는 '정부의 근본적인 물 대책 촉구'도 있었다는 사실도 새삼 상기시키고 싶다. 이번 시찰에서 농민들이 '대형 양수장 설치'를 건의했던 것처럼, 지금 한국 농촌은 올 가뭄은 이렇게 넘어간다고 해도 올해보다는 내년, 내년보다는 후년에 닥칠 재해를 더 걱정하고 있는 지 모른다. 철원평야를 비롯한 한탄강 유역이 이젠 그 강물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바짝 말라붙은 강바닥을 보고 확인했을 것이다. 물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비단 철원평야 뿐 아니라 한반도 전역의 사정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번 총리의 시찰에서 보았듯이 늘 하던 대로 가만히 있다가 '예산지원'의 최후 처방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또 되풀이했다. 사실 가뭄현장을 시찰하는 총리에게 향후 이 땅의 물 대책을 기대하는 것이 결코 무리가 아닐 만큼, 국민의 물 걱정은 태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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