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거물들의 잇단 가뭄현장 시찰을 바라보는 농민들의 시선이 영 곱지 않다. 덩달아 물 한 방울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농민들 앞에서 이들 거물들이 자신의 정치 생명줄인 양 지자체장들의 특별한 의전도 볼 상 사납다는 소리들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기에 그런 소리가 들리는지는 뻔하다. 수백m 강바닥까지 연결한 급수 파이프가 작동하고 바짝 마른논에 갑자기 콸콸 물꼬가 트이는 때에 맞춰, 점퍼차림의 정치지도자들이 검은 승용차에서 내리면, 역시 점퍼나 민방위 복장의 관계관이 재빨리 브리핑 차트를 넘기며 상황 설명을 하는 모습을 벌써 몇 차례나 TV 화면을 통해 보고 있다. 가뭄현장에서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이 '완벽한 연출'을 바라볼 때는 비록 밭 한 뙈기, 논 한 마지기 부치지 않는 도시민이라도 울화가 치미는 것이다.

정치지도자들이 농촌을 찾아가 가뭄 재해에 두 손놓고 있는 농민들을 위로하는 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10분 격려'를 받기 위해, 도지사 부지사 시장 군수가 업무를 전폐하고 대기하거나, 공무원들이 밤새워 브리핑 차트를 만들어야 할 뿐 아니라, 영화 세트처럼 양수기를 세팅하는 수고를 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건 격려가 아니라 민폐이다. 지자체장 입장에서는 모처럼 고위층에게 지역실정을 현장체험 하게 할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국고지원의 '선물'도 받을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다. 따라서 가능하면 "우리 지역을 방문해 달라"고 간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례로 李漢東총리는 며칠 전 철원지방 순시에서 풍암지구 저수지 축조비용 158억 원을 지원하기로 약속했으며, 엊그제 홍천을 순시한 金鍾泌 자민련 명예총재는 월운저수지 114억 원과 구만리 저수지 81억 원의 사업비 지원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정부가 가뭄대책으로 전국에 지원할 재원은 이미 나간 돈 104억 원과 추가로 지원키로 한 163억 원밖에 없다.

이런 약속이 향후 계획이라손 치더라도, 당장 발등의 불도 제대로 못 끄는 마당에 이건 좀 심하거나 '공약(空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부 지자체장들은 이런 약속을 받아낸 것을 자신의 공과치부나 든든한 '정치 끈' 확보로 과시하기까지 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지금 불타는 가뭄현장은 대선 주자들에겐 '대선 표밭'으로, 내년 지자체장 주자들에겐 '지선 표밭'으로 농락 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모내기 데드라인이 지나가고 있다는 현실위기를 제대로 인식해 주기 바란다. 자칫하면 올 농사는 패농을 맞게될 지 모른다. 물 찾기에 할만큼 다 해본 이상 농촌이 기대 볼 곳은 이젠 하늘밖에 없다. 농민들이 최후 수단을 쓸 수 있도록 준다던 지원비나 빨리 내려보내라고 정부를 호통치는 그런 정치권, "물 찾기가 더 바쁘다"며 높은 사람들의 순시를 사양하는 지자체장이 있다면, 그들이 진짜 '타는 농민심정'을 격려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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