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식 논설실장

 얼마 전 우리 사회에 '역사 가정법'에 대한 논의가 전개됐었다. 아니, 지금도 진행 중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남북 체제와 관련한 튀는 주장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은 강정구 교수의 역사 해석에 대해 학계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학자들이 주로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은 강 교수가 자신의 연구방법론이라고 밝힌 이른바 '역사추상형 비교방법론'의 학문적 타당성 여부다. 즉, 역사에 가정(假定)을 세워 실제역사와 비교하는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그럴 듯해 보이지만, 논리 전개 과정 곳곳에 허점이 있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주장한다. "1946년 당시 국민 77%가 사회 공산주의를 택했다면 그 체제를 택해야 했다." 이에 학계에선 반론한다. "소박한 민심의 표현이므로 체제 선택으로 볼 수 없다." 최근 신문법 위헌 논란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당국의 과거청산 논리에 언론자유를 억압한다며 반대한다. 민족과 민중독재에 근거한 '청산논법'에 동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근본적으로 '역사의 정의(正義)'가 무엇인지 누가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느냐는 반문들이다. 예컨대 '조국 프랑스를 해방시킨 드골 군대와 같이 조선 해방이 상해 임시정부 독립군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악의 근원이었다'는 식의 역사 정의를 민족과 민중이라는 특정 이데올로기 시각으로 역사를 가정하고, 그 가정대로 진행되지 못한 역사를 청산해야겠다는 것이야말로 '전체주의'라 주장한다.
 기존 학계와 보수 세력의 이 같은 반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강 교수처럼 본격적으로는 아니지만, 가끔 소박하게 그리고 혹은 낭만적으로 역사를 가정하기를 즐기는 게 사실이다. "그때 그랬다면"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지 않았다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낮았다면"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았다면, 안중근이 현장에서 잽싸게 사라졌다면" 하고 말이다.
 '가정을 하자면 수백 가지 가정을 할 수 있는데, 당시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면밀한 검증 없이 연구자의 입장에서 유리한 사례만 끌어다 쓰는 점이 문제'라는 지적이 있음에도 우리들의 가정은 그것 그대로 즐겁다.
 5·31지방선거 개표 과정을 보면서, 다른 곳에서도 그렇게 진행됐지만, 예를 들어 김진선 후보가 70%대의 압도적 표차로 승리하는 것을 보면서 어찌하여 갑자기 '역사 가정법'이 떠올랐을까.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그 깐족거리는 경쟁 따위는 논외로 하고, 그 때 이런 가정이 떠올랐다. "김진선 후보가 압도적 표차로 낙선됐다면" 혹은 "다른 후보자가 압도적으로 당선됐다면" 결과적으로 당선자에게 뭔가 좀 불온하게 된 이런 가정들이 그 순간 퍼뜩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무엇인가. 김 후보자가 압도적 표차로 승리하는 것을 보면서 역사 가정법을 떠올리는 한 지식인이 있다는 바로 그게 문제라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가정을 할 수 있으되, 왜 개표가 진행되는 그 시점에, 거의 완벽한 승리를 거둬내는 그 순간에 그런 반동적 가정을 했느냐, 바로 이걸 중대 문제로 삼아 보자는 것이다.
 포에니 전쟁에서의 한니발이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부였으며 뒤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되고 결국 그와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한 클레오파트라가 없었다면 서양사는 전혀 달라졌으리란 것이 오래된 역사 가정이다. 정말 그렇게 가정해 봄으로써 역사 당위가 기분 좋게 일그러져 보이지 않던가.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고, 안중근이 살아 독립운동을 계속했더라면 동양사는 지금처럼 지리멸렬하게 굴러가지는 않았으리라는 역사 가정만으로도 우리는 색다른 기분과 기운을 느껴 가질 수 있다.
 물론 '누가 역사 정의를 함부로 내릴 수 있느냐' 하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역사 가정에서 앞날에 대한 주목할 만한 길잡이를 만날 수도 있으므로 오늘의 승리자를 오히려 "압도적 표차로 낙선됐다면" 하는 식의 역사 가정은 그 또한 새로운 기분에 잠기게 만드는 등 아주 의미 없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본 논의의 핵심이다.
 어찌하여 이런 따위의 문제를 올려놓는가. 김 당선자의 강원 도정 지난 8 년간의 집권이 가져다준 가능성과 한계점이 너무도 분명히 그려졌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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