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경찰청 거두리 시대에 즈음하여

 강원경찰청이 새로운 청사를 짓고 이전했다. 실로 오랜만의 이사다. 실제로는 사상 최초의 이사라 할 수 있는데, 그만큼 떠오르는 상념이 적지 않을 터이다. 도민도 그렇고 공직자들도 그렇고 특히 경찰청 사람들이야 더 할 말 있겠는가. 고락(苦樂)을 같이 하고 애오구(愛惡懼)와 희비(喜悲)를 함께 해온 봉의산 시절에 대한 감회에 젖기도 할 것이다.
 신 청사에 입주하는 경찰로서 그러나 회상의 정서는 오랠 필요 없다. 문제는 보다 나은 앞날을 위해, 아니 범죄가 증폭하는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여 잠시 옛 장면에 젖었다가 즉시 깨어나 강원도의 치안을 부릅뜬 눈으로 다시 철저히 살필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새삼스런 사실 하나에 주목하게 된다. 신 청사에 입주하면서 이명규 강원경찰청장은 특히 강조하는 대목이 있다. 사실 지금까지 줄곧 철학 의지 신념 아래 추진 진행시켜온 시책이지만, 청사 이전으로 다시 한번 올곧게 해 보리란 생각을 강하게 펴 보이고 있다.
 그건 다름 아니라 '억울한 사람 없는 강원 만들기'다. 부제로 '비전 제로(Vision Zero)'다. 무엇을 '제로'로 만든다는 것인가? 대 전제로는 억울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형식의 '제로'다. '믿음직한 경찰'을 구현하여 '안전한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다. 아니, 천혜의 자연 환경과 자원의 보고인 강원도에 풍요롭고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민생 환경 침해 범죄 제로화를 추진해 보겠다는 얘기다.
 매우 바람직한 목표이거니와 잠시 여기서 다른 나라의 '제로' 정책의 예를 살펴보자. 지난 1994년에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윌리엄 브래튼을 뉴욕경찰국장에 지명했다. 왜 브래튼이여야 하는가? 보다 앞선 어느날 뉴욕지하철경찰서장이었던 브래튼이 한해 2만 건이 넘는 지하철 범죄를 줄일 방도를 묻자 '깨진 유리창 이론'을 발표한 조지 켈링이라는 학자가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두면 치안 부재로 여겨 그 일대가 곧 무법천지가 되므로 범죄율을 낮추려면 유리창을 갈아끼우는 등 사소한 것부터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무임승차부터 단속해 보라." 했다.
 이를 그대로 시행해 보니, 과연 무임승차자 7 명 중 1 명이 수배자였고, 20 명 중 1 명이 무기를 소지했더라 한다. 그리하여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브래튼을 경찰국장으로 앉히고 이른바 '제로 톨러런스(Zero Tolerance)'를 선포했다. 즉, "가벼운 범죄라도 결코 관용(寬容)하지 않겠다."는 선포다. 이게 효과를 보자 미국 교육계도 '제로 톨러런스'요, 일본 문부성도 '제로 톨러런스'를 채택한다. 한 마디로 엄벌주의요 우리식으로 일러 일벌백계(一罰百戒)주의다. 하나도 새로울 게 없는 이 제도로 뉴욕경찰은 톡톡히 재미를 본 셈이다.
 다시 '비전 제로'를 보자. '억울한 사람 제로'에다가 '강·폭력 제로' '교통 사망사고 제로' '환경침해사범 제로'도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지난한 사안들을 감히 '제로'로 만들어보겠다는 것이다. 가상하다 해야 할까 아니면 환상이라 해야 할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자세를 견지하겠다는 강한 의지다. 이 '4대 비전 제로'가 현실적 결과적으로 수렴되기만 하면 그야말로 강원도는 이상향이 될 수 있다.
 결국 '억울한 사람 제로'를 대 전제로 삼은 '제로 톨러런스(무관용)'가 이명규 강원경찰청장이 내세우는 '억울한 사람 없는 강원 만들기'다. 미국 것보다 인도주의적이니 옳고, 동양식 중용을 취했으니 무리 없을 듯하다.
 따라서 봉의산 시대를 마감하고 거두리 시대를 시작하는 강원경찰청으로서 이 사업을 보다 능률적 효과적으로 추진할 때, 경찰청의 기대대로 다른 분야에 '나비효과'를 일으켜 강원도 사회가 맑아지고 특히 억울한 사람이 없는 건강한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지난 반세기 질곡의 시대를 벗어난 이 새로운 문명의 21 세기에 강원경찰청 거두리 시대의 상징은 바로 이것 '비전 제로'다. 기대해 볼 만하지 않은가.

이광식 논설실장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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