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식 논설실장

 스펙트럼이 흐려진다. 아니, 스펙트럼이 확산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이념의 스펙트럼이 확 퍼져 이젠 어느 것이 이것이고 어느 것이 저것인지, 누가 이쪽이고 또 누가 저쪽인지 알 수 없게 될 지경이다. 잘 하고 못하고를 떠나, 좋고 나쁘고를 떠나, 옳고 그르고를 떠나 이런 현상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도 같다.
 노자의 '도덕경'에 이런 말이 나온다.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라." 이는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 위에 자리 잡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어떤 일을 이룬 뒤에도 다만 그것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의미요, 또 한번의 성공을 위하여 다시 앞으로 나간다는 뜻이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편에 보면,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북명(北溟)이라는 자신의 현실을 박차고 튀어 올라 붕(鵬)이라는 새로 변신하여 남쪽으로 날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 두 이야기는 하나의 전환을 얘기하고 있다. 대 변신, 새로운 세계로의 비상을 말하고 있다.
 최근의 이념적 성향의 변화 양상을 보자 하니, 이런 '도덕경'과 '장자'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더란 얘기다. 끊임없는 변화상이 세상이고 인생살이이다. 변화할 것은 변해야 한다. 그러고 세상은 응당 그렇게 변화를 긍정하게 돼 있다. 차라리 변화야말로 순리요 철리가 아니던가.
 연전에 우리 사회에 새로운 우파가 생겨났다. 이른바 '뉴 라이트 네트워크'다. 이 그룹엔 신지호 박효종 김영호 김일영 교수 들이 들어 있다. 이들은 한나라당 내부 보수와 좌파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우파 근본주의를 비웃으면서 중도에 가까이 간 우파다. 그러자 이번엔 새로운 진보파가 생겨났다. '좋은 정책 포럼'의 임혁백 김형기 김균 정해구 교수가 그들이다. 이들은 열린우리당 내 진보 그룹과 민노당을 포함한 좌파 근본주의의 노선이 잘못됐다며 역시 중도에 가까운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며 사회주의와 신자유주의 모두를 넘어서는 대안적 발전 모델을 제시하려 한다.
 이렇게 보면 좌우 모두 '중도'로 모여드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 지식인 사이에 이념과 노선이 중도 쪽으로 몰려가고 있는 이 와중에 그러나, 논쟁은 계속된다. 올해 지식인 사회 논쟁의 서두를 장식한 것은 지난 2월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비판하면서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다. '해방전후사 재인식'을 펴낸 논자들은 '해방전후사 인식' 편집을 담당한 논자들을 "민족지상주의와 좌파 민족주의 진영의 정치학이다."라며 공격해대고 있다.
 그리고 신용하 교수와 안병직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놓고 격돌을 벌이고, 최장집 교수와 백낙청 교수는 '평화냐 통일이냐'를 놓고 논리 대결을 펼쳤다. 목하 이념의 과잉이 아니라 이념의 교통 정리를 위해 예전에 그리했던 것 모양 지식인들이 대전(大戰)을 펼치는 양상이다.
 그리고 돌아보는 오늘의 정황이다. 오늘의 정황이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그것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가리킨다. 아니, 한미 FTA 체결과 이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심적 정치적 상태를 말한다. 한미 FTA 체결 지지로 노무현 대통령은 사실상 중도 보수 노선을 선언한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는 '실용주의자'라는 표현을 썼지만, 보수주의자들은 '중도 보수'라고 이름 붙여 줬다. 하여간 보수라면 우파다. 그러므로 좌파 노무현이 우파가 되는 순간이 한미 FTA 체결인 것이다. 아니, 한미 FTA 체결이 진보파 노무현이 보수파 노무현으로 변화되는 순간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 변화를 '변절'이 아니라 '곤이 붕 되어 날아가기'로 이해해 보자는 것이다.
이광식 논설실장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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