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 혹은 누가복음 14장 7절

 행사 때마다 느끼는 점 한 가지가 있다. 단상의 자리를 어떻게 놓을까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누구를 앞자리에 앉게 하고, 누구를 그 옆 자리에 배치할 것이며, 또 누구를 뒷자리로 밀어 놓느냐. 주관처의 입장에선 이러하고, 초청받아 행사에 참석한 사람의 위치에선 내가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 또 문제다. 앞자리에 앉을 것이냐, 아니면 뒷자리로 잡아야 하느냐. 생각해 보면 마치 코미디 같은 일이다.
 특히 이럴 때 권할 말이 마침 성경에 나와 있어 소개한다. '신약전서' '누가복음 14장 7절' 이하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이다. 예수는 초청- 받은 사람이 상좌에 앉는 것을 보고 느낀 바 있어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네가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왔을 때 청한 자가 와서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예수는 계속한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실로 공감이 가는 말씀인데, 이를 읽고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하거나 높은 벼슬자리에 앉아계신 분들께선 스스로 부끄러워할 것 같다. 눈치를 보다가 앞자리에 앉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뭔가 찔리는 바 있을 듯도 하다. 사회적 서열이라는 게 있으므로 당연히 앞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믿고 그렇게 한 사람도 사실 정말 그럴 만하냐고 스스로 물을 때 아주 부끄럼 없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대놓고 자기가 권위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신 있게 자기가 권력을 가졌다고 믿는가? 그렇다 하여 앞자리에 앉는 것이 마땅하고 온당한가? 사실 겸손하고 또 진실로 권위 있는 사람은 한 번쯤 이런 의문을 스스로에게 물어 봤을 것이다.
 권력은 어떤 속성을 가지나? 1993년 봄 워싱턴 시내 고급 식당가에 예약도 없이 불쑥 쳐들어와 자리를 내놓으라는 낯선 젊은이들이 있었다. "우린 백악관에서 왔어!" 이렇게 소리 지른 이들은 바로 클린턴 대통령을 따라 백악관에 입성한 젊은 참모들이었다. 언론은 이들을 '젊은 얼간이들(junior twits)'이라 불렀다. 권력이 고약한 것은 그것을 쥐면 누구나가 휘둘러보고 싶어진다는 데 있다. 이게 이른바 '망치의 법칙'이다. 애들에게 망치를 주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사회학자 미헬스는 모든 거대 조직은 과두화(寡頭化)한다고 말했다. 권력의 실세들이 차 치고 포 치고 다 해 먹는다는 얘기다. '젊은 얼간이들'이 그런 경우인데, 이거야말로 천격(賤格) 권력의 예다.
 한 거대 집안의 종손이 손바닥에다가 늘 '집중유권(執中有權)'이란 글귀를 쓰고 다니기에 물었더니 "종손으로서 권위를 유지하려면 매사에 중용을 잡아야 합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오더란다. 이렇게 중용을 택해야지 배 내밀고 앞자리에 앉는다 하여 권력이 권위가 되는 게 아니다. 혹은 이렇다. 조광조가 백성의 신망을 받은 이유를 율곡 이이는 이렇게 말한다. "대사헌 조광조가 법을 공정하게 시행하니 사람들이 감동하여 그를 '우리 상전'이라 하더라." 대사헌(大司憲)이란 서슬 푸른 자리다. 이렇게 권력 있는 자가 권세가에 맞서 백성들 편을 들었으므로 마땅히 존경받을 만하다는 말씀이다. 다만 권력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진실로 권위가 있는 권력일 때에 앞자리에 앉을 수 있다.
 오늘도 내일도 수많은 행사가 열린다. 자, 어디에 앉을 것인가? 그 대답은 자신이 내려야 할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외친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광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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