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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와 오늘날의 행정부서를 일대일로 비교하는 짓은 사안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관점으로의 접근이므로 오해의 위험성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이른바 삼사(三司)라고 하는,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官)은 지금의 어느 부서에 해당하는가? 이런 물음 자체에 우선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이의 답으로 사헌부는 오늘날의 감사원이다, 검찰이다 하는 식의 대답에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사간원의 경우는 간쟁(諫諍)이나 비리 감찰의 역할도 있었으니 지금의 감사원이 어지간하나 조금 확대 해석하면 국정원도 들어간다는 견해도 있는데, 하여간 뭔가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흔히 예컨대 조선시대의 사헌부를 검찰에 비교하여 말하길 즐긴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한 번 "오늘날 '언론'에 해당되는 옛날의 부서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물음을 물어보는데, 일단의 논자들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이 '삼사'가 바로 '조선시대판 언론'이었다고 주장한다. 사헌부가 시정을 논의하고 백관을 규찰하며 기강과 풍속을 정립하려 했으니까 곧 언론이요, 사간원이 국왕에 대한 간쟁을 담당하고, 홍문관이 정책을 개발 및 심의하는 곳이었으므로, 포괄적 의미에서 이 모두를 합한 삼사야말로 오늘날 언론이라는 얘기다.

조선시대판 언론 '삼사'
 삼사 중 사간원과 사헌부가 함께 언론을 펼 때 이를 '양사합계(兩司合啓)'라 했으며, 홍문관까지 합세해 언론을 펴면 '삼사합계'다.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삼사의 전 관원이 국왕의 허락을 요구하는 연좌데모 같은 언론 행위를 '합사복합(合司伏閤)'이라 했다. 오늘날 언론이 하는 일을 삼사가 했다고 볼 수 있는 예다.
 다음과 같은 일화는 또 어떠한가. 성종이 홍문관과 사간원을 혁파하고 언관(言官)을 파면시키자 뒷날 다른 언관이 '실록'에다가 성종이 "언로(言路)를 막았다."고 기록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권력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사헌부의 노력 역시 집요하여, 성종 때 권력자의 비리를 비판하자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 68 명이 교체된다. 이는 즉 대사헌을 수 없이 갈아치워도 권력을 탄핵하길 끊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지금의 언론이 하는 일과 같지 아니한가.
 역사 드라마가 "어명이오!" 하는 한 마디가 모든 논리를 뛰어넘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조선의 임금은 마음먹은 대로가 아니라 엄격한 법률적 근거 아래 어명을 내릴 수 있었다. 사헌부가 직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임금조차도 월권 사실이 발견되면 가차 없이 탄핵했기에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권력의 비리를 감시하는 서릿발 같은 엄정함이 있었으므로 사헌부를 서리 상(霜) 자를 써 '상대(霜臺)'라 불렀고, 이런 의미에서 지금의 '언론'은 본질적으로 바로 그 '서릿발' 곧 '상대'다.
 조선의 사헌부는 대상을 가려가며 간쟁한 것이 아니다. 사대부를 존중한 세종 임금은 물론, 칼로 권력을 잡은 태종에게도 거침없이 간쟁했으며, 심지어 죽은 대신들의 뼈를 갈아 날려버린 폭군 연산군 앞에서도 사헌부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엄격 엄정한 언론 역할을 하는 부처가 존재했기에 조선은 썩지 않고 500 년 푸른 역사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
 그런데 오늘날, '취재 지원 선진화 방안'이란 이름으로 군사 파시즘적 언론 탄압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며 언론들이 연일 불만을 터트리자, 얼마 전에 대통령과 언론단체 대표들이 공개토론의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대화 이후에도 언론의 정보접근권이 과연 보장되는지 등을 의심하는 언론계의 회의감은 여전하다. 어떤 형식으로든 권력이 언론을 규제하려 든다면 단언하건대 뒷날 역사의 매서운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이광식 논설실장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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