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간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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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유명한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내 가슴은 뛰노라'라는 시의 전문은 이렇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볼 때 내 가슴은 뛰노라/ 내 어릴 때도 그랬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랬고/ 늙어서도 그럴 것이니,/ 그렇지 못하면 죽게 하라./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앞으로 나의 나날들이/ 자연에 대한 경애심으로 이어지기를."
 이 시를 읽을 때 아이들의 순진무구에 새삼 감동하게 되지만, 왠지 필자는 한 대목에서 좀 삐딱한 생각을 품는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읊은 시인이 아이들의 순수함을 미성숙 또는 미분화 상태의 그것이라 전제하고, 그야말로 어른다운 자족감 또는 자만감에 넘쳐 말한 것은 혹 아닌가 하는. 공감해 줄 사람 별로 없을 터이지만, 일단 이렇게 해놓고 다음 논의를 진행시켜 보자.
 얼마 전에 여성단체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한 여성 패널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1997년에 '강원여성헌장'이 제정됐는데, 거기에 이상한 문장이 있어요. '강원여성은 여성이기 이전에 독립된 인격체이다'가 그것인데요, 당연한 것을 굳이 말한 것은 여성의 열등함을 전제한 것이라 봅니다. 지난 몇 년간 수정을 요구했으나 아직 고쳐지지 않았으니, 양성평등 시대에 맞지 않은 처사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워즈워드에 딴지를 걸어볼 심산이었던 필자는 당연히 즉각 그럴 만하다는 생각을 굳힌다. 이른바 공리(公理)란 증명할 필요가 없는 명제를 이른다. 인간이 인격체이듯 여성 또한 인격체인데 굳이 "여성이기 이전에 인격체"라는 공리적 말을 집어넣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성 패널의 이 디테일한 시각은 따라서 백 번 옳다. '남성은 남성이기 이전에 인격체다' 하는 따위의 말을 할 리 없다는 점을 떠올려 보라.
 알 만한 사람들은 알지만 요즘 '양성평등(兩性平等)'이 시대적 화두다. 옛날엔 '여성은 여성적이어야 하며 남성은 남성적이어야 사회가 건강해진다' 했지만, 요즘은 '여성은 여성적임과 동시에 남성성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남성 또한 여성성을 곁들여야 건전 건강한 사회가 된다'는 생각으로 바뀌어져 간다. 이게 양성평등적 사고다. 남성이 하는 일을 여성이 못할 게 없고, 그 역 또한 그렇다. 예컨대 여성에게도 화재진압권을 주고, 남성에게도 육아휴식권을 주자는 얘기다.
 지난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제4회세계여성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성주류화(性主流化·Gender Mainstreaming)'를 여성 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선택한다. 모든 공공정책에 남성과 여성의 관점을 고르게 반영하자는 주장이다. 남성에게만 이익 되거나, 여성을 폄훼하는 일이 발생치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나 여성계 일부에서 목청을 돋울 뿐 성주류화는 사회적 이슈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 2002년에 '여성발전기본법'이 제정되고, 2004년에 정책과 제도에서 남녀에게 미치는 차별적 효과를 평가하는 이른바 '성별영향분석평가'를 하게 했음에도 말이다.
 이런 전근대적 현상을 남성들이 먼저 성찰해야 한다. 동시에 여성들은 더 적극적으로 성주류화 기치를 쳐들어야 한다. 로또 광풍이 불듯, 월드컵 돌풍이 일듯 누군가 그야말로 온전히 '미쳐야' 양성평등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고전적 사회에 충격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여성들이여, 떨쳐나서라. 행정과 의회의 양성평등 이념 수렴 여부를 모니터링하기 전에 우선 남성들에게 나이브하게 아니, 강렬하게 외쳐라. 더 이상 아들은 하늘이고 딸이 땅이 아닌, 양성이 평등인 세상이 오도록 여성들이여, 소리를 높여라. "나의 여성성을 가지세요, 그리고 그대의 남성성을 나누세요. 그러자면 자, 쉘 위 댄스? 그대 남성들, 우리 여성들과 춤 한 번 춰 볼까요?"
<이광식 논설실장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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