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식 논설실장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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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계속하여 이어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인식이 있다. 이를 한자어로 ‘단학속부(斷鶴續鳧)’라 하는데, ‘긴 학의 다리를 잘라 짧은 오리 다리에 잇는다’는 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단학속부’란 ‘세상에 이어지는 것이 있지만, 이어지지 않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라’는 뜻으로 쓰인다.
 진보든 보수든 사람 또는 정권이 바뀌면 지난 과제가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어질 수 없는 정책이 있게 마련이다. 추석 전에 강원도를 다녀간 후보들의 강원도 관련 공약을 보면 계속해 마땅한 과제를 내세운 것이 많은데, 정권 또는 통치자가 바뀌어도 풀어내야 할 ‘같은 숙제’가 물론 있을 터이나 계속해본들 실현 안 될 과제도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 주자들은 모든 과제를 열거하면서 ‘반드시 이루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자연스럽게 공약(公約)이 될 개연성을 높이는 이런 주장들이 추석 이후 다시 강원도를 찾을 때 반복될 것이 염려된다. 이른바 ‘추석 민심’을 살핀 다음의 대선 주자들의 지방론 또는 지방정책론이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가 주목되는데….
 필자는 미당 서정주 선생의 ‘귀촉도’를 읽을 때 강원도를 떠올린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 옷깃 염여 염여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지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파촉’이란 사면이 험준한 산맥으로 둘러싸인 중국 서남단 쪽 변방을 말한다. 분단 한반도로선 바로 강원도 같은 곳이다.
 무릇 정치가란 얼마나 포장을 잘하던가. 프랑스 화가 다비드가 그린 명화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에서 나폴레옹이 타고 있는 백마는 실제로는 당나귀였다. 험준한 산을 잘 타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당나귀로 알프스를 넘었지만, 화가 다비드는 이를 백마로 바꾼 기막힌 포장술로 나폴레옹의 사랑을 엄청 받았다는 것 아닌가.
 추석 이후 강원도 행 대권 주자들은 말을 탈까 당나귀를 탈까. 물어보나 마나 결론은 백마일 터이다. 정치가란 도대체 얼마나 포장을 잘하던가. 강원도 관련 모든 공약을 그럴 듯하게 포장할 게 뻔하다. 예컨대 반복되는 5대 사회간접자본재 확충을 비롯하여 접경지, 통일 및 환동해 거점, 동계오륜, 환경 생명 보전, 낙후 극복 등을 제시할 것이다.
 마땅한 항목들이지만, 진실로 강원도를 고민해본 대권 주자가 있을까. 지난 두 세대 동안 그렇게도 외면하던 중앙 정치권이 유독 이번 대선에서 특별히 강원도에 대한 사랑을 보여 줄까. 필자의 이런 자문의 자답이 부정적이라는 데에 강원도의 비애가 있다는 것이다.
 한 명민한 신하가 왕의 잘못을 간하러 입궐했다. 이를 눈치 챈 왕이 고치겠노라고 먼저 얘기하자 신하가 “과이개지하면 선막대언이니이다(過而改之 善莫大焉).” 한다. ‘잘못한 이후에 이를 고치는 것이 진정 훌륭하다’는 말이다. 공자도 “불이과하라(不二過).” 곧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라’ 했다.
 그러므로 바란다. 같은 잘못을 거듭하지 말라. 눈물 아롱아롱 먼 파촉 땅 강원도를 찾아오는 대권 주자들이여, 길이 험해 당나귀 타고 올 텐데 이를 백마로 포장하지 말라. 학의 다리로 오리 다리를 잇는 식의 터무니없는 짓을 강원도에 저지르지 말라. 박제된 과제를 반복하는 앵무새 노릇 그만두고, 가장 강원도적 공약이 무엇인지 진실로 고민해 보라.
 그리하여 강원도에 와선 제발 포퓰리즘, 국가 통제주의, 정치적 제스처, 악어의 눈물, 권력형 권위주의, 구태의 무지, 기회주의를 버리라. 오리엔탈리즘적 호기심에 찬 구미(歐美)의 관광객 같은 태도가 아니라 강원도의 아픔과 원망(願望)을 온몸으로 감싸고 받들라. 한 번쯤 ‘강원도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시도하고,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 그야말로 ‘살아 있는 공약’을 제시하라.
 이렇게 하지 않을 경우 대선은 얼마나 지방을 외면하는가. 아니, 강원도를 얼마나 죽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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