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이 많은 우리 선조들은 항상 우리주위에 있는 계절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만물이 소생하며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봄은 여성의 계절로, 결실을 맺으며 추수할 힘이 필요한 가을은 남자의 계절로 표현했다.

바바리 깃을 세우고 낙엽 위를 걷는 멋진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가을을 남자의 계절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남자의 힘이 꼭 필요한 가을걷이에 사용하라고 가을과 남자를 연관 지었을 것이다.

고유의 명절인 추석도 지나고 산과 들이 때때 옷으로 한창 갈아입고 있는 만추(晩秋)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됐다.

하지만 이 가을에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남자임을 주장할 수 있는 ‘진정한 남자’가 얼마나 될까.

IMF 외환위기라는 경제한파로 직장과 생활터전을 잃은 가장, 수해 등 자연재해로 몸 누일 공간마저 빼앗긴 가장들은 이 가을이 낭만으로, 추수의 기쁨을 만끽하기보다는 다가 올 겨울이 더 걱정이다.

몸뚱이 하나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었던 시대도 있었지만 돈이 돈을 부르고 가난이 더 빈궁한 생활을 부르는 각박하고 처절한 시대에 살고 있다.

부유한 집의 애완동물보다도 못한 생활을 꾸려 나가는 남자(가장)들이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비록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된다 해도 가을정취를 느낄 수 있으며 낙엽을 사랑할 수 있는 포근한 정서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남자가 얼마일까?”라는 자조적인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내리기가 결코 쉽지 않다.

당당한 가을 남자임을 주장하는 데에는 많은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며 넓은 집도, 휘황찬란한 세간이 필요하지도 않으며 다만, 가족과 함께 부대끼며 최소한의 정을 나눌 수 있으면 된다.

하지만 현재의 사정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 정치권의 관심은 국민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는 12월에 있을 대선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잡을 수 있을까’’에, 국민에게 필요한 법안통과보다는 정당의 이익에 더 관심을 가지는 현실에서는 결코 ‘가을이 가을다울 수 없다’..

과연 우리 선조들이 현대에 산다면 가을을 남자의 계절로 표현했을까?

정치인과 부유층 인사들은 이 가을의 단풍을 혼자만 즐길 것이 아니라 모두, 우리가 즐길 수 있는 방법 찾기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낙엽 위를 걷고 싶다.

전경진·춘천시 퇴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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