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2월 19일 새벽 14대 대선에서 190여 만 표차로 낙선한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대국민성명을 발표했다. “패배를 인정한다. 정계에서 은퇴하겠다. 장차 김영삼 새정부가 부디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요지였다. 대선 출마 3연패에 통분을 억누르며 정계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다음날부터 과거 그를 싫어하던 언론까지 모든 언론들은 “진정한 지도자” “정계의 거목” “탁월한 경륜의 정치인”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당적을 지닌 채 은퇴를 선언했듯이 김대중의 속셈은 전혀 정계를 떠난게 아니었다. 1993년 1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6개월간 수학하고 귀국한 그는 이듬해 아태평화재단을 창설했다. 1995년 6월 제1기 전국지방선거에 앞서 김영삼은 “김대중은 이제 끝났다. 그에 대해 신경 쓸 게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민주당의 시도지사 등의 공천을 주도하는 등 지방선거를 지휘, 김영삼과 여당을 패배케 한 후 정계은퇴를 번복하는 성명을 내 국민을 놀라게 했고 9월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자신이 만든 민주당을 몰락시켰다. 계획한대로 슬그머니 정계에 복귀했고 결국 온갖 비판여론에도 불구하고 71세 때인 1997년 15대 대선에서 당선됐다. 대권도전 4수만에 권좌에 오른 것이다.

16대 대선의 개표가 끝난 2002년 12월 20일 상오 노무현 후보에게 패배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는 승복자성·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김대중에게 패배한 후 5년 동안 와신상담했으나 결국 2연패 한 것이다.

선거를 50일 앞둔 요즘 이회창 전 총재의 대선출마 여부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는 지난 정초에 “내 처지에 대선을 놓고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는 것은 오만한 생각이다. 현실정치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그동안 정치상황이 격변하고 여기저기에서 출마요구가 거듭되자 고민하고 있고 또 출마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 골수지지세력 등의 출마요구의 목소리가 높아가자 “불출마 천명에 변함은 없으나 정권교체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고심중”이라는 얘기까지 들린다. 이 전 총재로서는 15대 대선 때도 그렇고 특히 16대 때는 두 아들의 병역면제 논란과 관련한 김대엽 소동과 노무현-정몽준의 후보 단일화 파문 등에 의한 연패가 너무나 분하고 아쉬울 것이다. 72세라는 고령과 3번째 출마가 큰 부담이되지만 한편으로는 당선 때 73세였던 이승만 대통령과 서독의 아데나워 총리, 71세의 김대중, 70세의 레이건 등이 위로가 될 수 있다. 여기에다 네번도전에 성공한 김대중, 3번으로 성공한 프랑스의 미테랑 전 대통령의 예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을 지 모른다.

후보가 된 후 5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율을 바탕으로 선거준비에 몰두해오던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로서는 큰 걸림돌을 만나게 된 셈이다. 만일 이 전 총리가 무소속으로 출마할 경우 이 후보와 한나라당 지지표가 분산될 게 뻔하고 대선이 더욱 어려워질 것은 명백하다. 대통합 민주신당 등 범여권은 뜻밖의 호재에 쾌재를 부르고 있다. 이 후보로서는 박근혜 전 대표측을 의심하는 눈치이나 그보다는 이 전 총재와 만나 재출마여부에 담판을 짓는 게 시급할 듯하다.

이 후보로서도 여러가지면에서 심사숙고 해야 할 것이다. 10년 전 5년전에 비해 시대도 나라 안팎 상황도 많은 국민의 인식과 생각도 달라졌음을 깊이 숙고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은 참으로 억울하고 마음아프고 통분했겠지만 선거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은퇴를 했던 이 전 총재의 결단을 잊지 않을 것이다. 멋진 승복과 퇴장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최선인가. 기어이 3수를 하는게 도리인가를 하루 빨리 결심해야한다.

이성춘 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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