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영 달
한국고전연구감정위원회장
고조선시대 청동제품인 비파형동검과 다뉴세문경은 동이족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정도로 세계 고고학계에 인식되었다. 비파형 동검의 특징은 칼날이 비파악기처럼 구부러져 있고, 칼몸에 등대(等臺)가 있어 휘기 쉬운 약점을 보완한 것이다. 중국식과는 완연히 달라 요령식 또는 만주식 동검으로도 부른다.

그 시대 청동유물은 구리+주석+아연의 합금으로 이루어진 첨단기술로 아연을 섞는 기술(용해 450℃)이 다른 나라에서는 개발되지 않았을 때였다. 우리 민족만이 알아내어 주조하기 쉽고, 표면이 금빛 처리되는 검과 거울을 만들어 냈다. 이같은 청동과 아연 합금 성분은 고조선화폐에도 똑같이 나타났고 잡물이 엽전에 적었던 조선시대 중기까지도 전통적으로 이어졌다.

고조선의 야금, 주물기술 거푸집 제조, 제철 제강 기술 등은 인접국가들이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 또 현대의 과학기술로도 세문경 도안의 노하우를 따라가지 못할 만큼 신비하고 훌륭한 독창적 기량이었다. 청동기에 나타난 기하문양인 동심원과 삼각형 등 세문은 아름다운 미지의 우주세계 좌표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고조선 후기에는 문자를 넣은 명문 청동기도 보인다.

고조선의 유적과 유물을 다룬 북한 발행, 「조선유적유물도감」을 보면 이따금식 보이는 금세공품도 신라시대 찬란한 왕관급에 못지않는 것이 발견되어 놀라게 된다. 주물로 된 청동기 장식품에 사람과 동식물 그림을 깔끔하게 주입시킨 유물에서는 조선시대 열쇠패(別錢을 대형화시킨 민속공예품) 제작 수준에 뒤지지 않는 작품들로 보인다. 고조선의 선조들이 마음만 먹었으면 지금부터 4천여년 전 그 시대에도 아름답고 훌륭한 열쇠패와 별전(기념화폐의 일종인 민속품)을 만들고도 남았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고조선의 금속 공예품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 시대 실물화폐가 적고 역사기록에 있는 것마저 나타나지 않고 있어 안타까울 때가 많다. 고조선의 별전이나 열쇠패도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고조선에 해당할 하, 은, 주시대~춘추전국~진·한시대까지 중국화폐는 수백 종이 제조되었고 많은 것은 가마니떼기로 나타나고 있는데 비해 우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종수, 수량이 모두 적다. 그 시대 역사에 기록된 국력이나 교역, 경제, 사회활동을 보아도 최소한 수십종 정도로 고조선 화폐가 더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데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생각해보면 첫째, 나라가 패망하여 역사기록조차 깡그리 없어진 데다가 그 강역의 백성까지 노예로 끌려갔거나 볼모로 잡혀 화폐뿐 아니라 모든 것의 소유권을 주장할 만한 항민(抗民)조차 없어진 것이다.

중국 길림대 장박천 교수(역사학)는 이제까지 중국화폐로 보아온 명도전(明刀錢:접는칼, 모양에 ‘明’자가 비슷한 글자가 새겨져 있음)이 고조선시대 제조된 화폐일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유고를 남기고 몇해 전 별세했다. 아시아의 고대 청동기 연구가인 러시아의 유·엠부찐 교수는 명도전이 출토된 곳을 표시한 지도를 보고 타당성이 있다고 평가, 장 교수의 연구에 손을 들어 주었다. 또한 북한 역사학자들은 최근 중국 전국시대 동전에 한자가 한 두자씩 들어 있고 엽전의 초기단계로 사각 구멍대신 원공(圓孔)으로 된 원전 중 일부가 고조선 화폐일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상대국 전문가가 인정하고 양보하지 않는한 한닢의 화폐역사를 놓고 끊임없는 학술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더구나 동북공정으로 없는 문화영역도 확장하려는 음모까지 배어 있는 중국이 이런 일에 쉽게 양보할리 없다. 비록 작은 엽전이지만 외국에 있는 국보급 문화재 송환보다 더 어려운 면도 있다. 한국의 고전연구가들은 때로는 북한학자들과도 손을 잡고 고조선 화폐를 찾아내어 정리할 것이 많아 보인다. 그 시대 문화예술의 총아인 화폐는 귀중한 역사적 산물이다. 선조들이 남겨준 유물을 우리 것으로 찾아오는 것은 후손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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