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춘 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
1964년 6대 국회초에 민정·민주·자민·국민의 당 등으로 사분오열됐던 야권은 신문윤리위원회 파동과 한일협정 추진을 두고 현실파인 민중당과 강경파인 신한당으로 재편, 갈리었다. 신한당은 1966년 3월 30일 전당대회를 열고 윤보선을 당총재 겸 대통령후보로 선출했고, 원내 제1야당인 민중당은 10월 22일 전당대회에서 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을 대선후보로 추대했다. 하지만 6대 대선이 다가오자 양당의 지도부는 나란히 출마할 경우 공멸한다는 위기감을 갖고 연말에 야권후보 단일화 추진위를 구성했다. 이어 1967년에 들어서 1월 16일~2월 6일 야권의 원로인 윤보선·유진오·백낙준·이범석 등은 5차례에 걸쳐 4인 거두회담을 열고 단일후보 단일야당 원칙에 합의했다. 마지막 회담 때 유진오가 민중당 간부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선공후사와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내가 양보하고 해위(윤보선의 호)를 밀기로 하자”고 결단을 내려 쉽게 타결됐다. 다음날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통합전당대회는 신민당 창당과 함께 당수에 유진오, 후보에 윤보선을 선출했다.

이와는 달리 1997년 15대 대선전에있었던 김대중-김종필 DJP밀약은 정치적 야합이었고, 2002년 노무현-정몽준 후보 간의 단일화 합의는 막판에 정 후보의 파기 선언으로 무산됐다. 이번 17대 대선에서도 후보단일화는 중요한 이슈로 등장했다. 각 당과 각 후보 모두 저마다 자기 쪽으로의 후보단일화를 기대하고 추진했다.

이명박 후보 측은 10년만에 보수집권이라는 명제를 내걸고 이회창 후보의 양보사퇴를 내심 고대했다. 그가 출마의 변에서 ‘살신성인’ 운운한 대목에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끝까지 완주 하겠다”고 한데 이어 “대선의 승패와 관계없이 신년 초에 신당을 창당하겠다”는 공언에는 기대를 접은 듯하다. 최초의 단일화는 원내 제5위의 정당인 국민중심당의 심대평 후보가 이회창 후보지지 선언으로 이뤄졌다. 충청권 공략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는 한나라당으로서는 씁쓸했을 게 분명하다.

후보단일화는 정동영 후보 측이 급하다. 선거 막바지의 여러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2위로 올랐으나 단일화는 승리의 발판 구축에 필수적이다. 후보등록 전 민주당의 이인제 후보와 원칙·조건에 합의했으나 결국 당 운영위 비율 50대 50에 대한 대통합민주신당내 각파의 반대로 좌초됐다. 다음 정 후보 측은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후보 측과 막후협상을 벌였으나 이견이 불거진 여론조사의 횟수문제도 선관위가 원천적으로 선거운동기간 중에 ‘여론조사 불가’ 해석으로 벽에 부딪혔다. 더구나 문 후보 측은 “참여정부의 실정에 책임을 지고 정 후보가 결단을 내려 우리의 손발이 되어 달라”고 주장해 난감해 하는 상태다. 정 후보 측은 다시 민주당과 이인제 후보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이 후보의 독주 주장에 속을 태우고 있다. 물론 민주당 측도 낮은 지지율에 자칫하면 총선까지 그르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 속에 당원들을 상대로 독자완주·신당과 단일화·한나라당과 연합을 명제로 전화설문조사에 나섰지만 마음이 급하기는 마찬가지다.

오늘로서 투표일까지 남은 기간은 7일. 긴장의 연속인 이 기간동안 선거판에 변화를 몰고올 변수로는 후보단일화, 부동표의 동요, 폭로 또는 중대발표, 나라를 뒤흔들 만한 사건·사고 등이 꼽힌다. 분명한 것은 후보단일화의 원칙과 합의 내용이다. 소위 DJP식의 권력 나눠갖기와 사기 거짓을 곁들인 단일화는 야합으로서 결코 두 번 다시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국민이 납득할 만한 국가발전차원의 대의와 명분이 있어야 한다.

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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