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쓴이 : 강원노인복지회 高濟國이사장


문명의 위기는 문명의 저질화에서 온다.

요즘 항간에 지도자 빈곤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다.

지도자의 책임은 문명의 고품질화에 있는데 그들의 그 책임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당위적인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밀고 나가지 못하는게 당사자의 책임인지 혹은 풍토적 메카니즘이나 소위 가신으로 치부되는 일단의 무리들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자명한 것은 책임질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며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현상은 특정 분야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일반적으로 지도자와 피지도자와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예컨데 고통받는 처지에 놓인 세상사람들속에 내려와서 더불어 생각하고 살아가려는 동고동락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까마귀 나는 골에 백조야 가지말라’하면서 성별되게 독야청청하는 지도가 있고 전리품은 승자의 것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지도자가 있다.

백성은 어떤 유형의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시운이 달라진다.

그가 제위보(濟危寶)를 만든 임금이냐? 여러가지 구실로 강화천도를 한 왕이냐? 연산군같은 인물이냐? 에 따라 천양지판이 된다.

다만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오리발 내미는데’서 백성은 더욱 피곤하다.

얼마전 사회운동가로서 지조있다고 평가받던 원로 한분이 선거용으로 쓰이다가 물러났다.

고사끝에 수락했던 직책을 ‘개판이구먼’ 하고나서 홀홀히 던져버렸다.

그동안 이 땅의 이상주의자들은 흙탕물인물 알면서도 내 한몸 던져 보겠다고 뛰어든 용단을 가상히 여겼고 기적을 바라는 심정으로 어떻게 헤쳐나가는지를 숨 죽이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독야청청하는 근본주의자나, 나 몰라라하는 은둔자나, 버스 지나간뒤에 툴툴거리는 불평분자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서정인은 ‘용병대장’에서 “저 수사는 수도원 울타리 안에 잠자고 엎드려 있었더라면 성 속에서 두루 존경 받았을 텐데 이 풍진 세상에 뛰어들어 양쪽에서 버림을 받는구료…”한다.

서 마담의 비애가 노신사 한분의 비애가 되어서는 안된다.

한 문명도, 나라도, 가문도 마찬가지다.

‘살아남은자의 슬픔’에서 시인은 살아남은자가 얼마나 요행스러웠기에 이 거칠은 세상에서 살아 남았는지를 슬퍼하고 있다.

이 땅에 살아남은 자들은 올 곧게 살려다 요절한 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새해 아침에 문명의 저질화를 막아보려는 사람들의 뜻이 하나하나 모아지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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