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탓인가.

이 때쯤이면 잠이 깬다 새벽 세시. 창 밖 멀리 보이는 들판 가운데 가로등 불빛 아래로 흰 눈 송이가 쏟아지는 것이 보인다.

눈 내리는 모양을 보노라니 삼십여년 전 이곳에 처음 정착 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 때는 전기도, 전화도 없고 지금같은 큰 도로도 없었다. 겨울이면 눈이 하도 많이 내려서 눈가래로 치울 엄두를 못내고 그냥 눈위로 설피라는 신을 신고 다녔다.

이때 쯤이면 설피를 신고, 멧돼지 사냥을 하였는데 멧돼지를 잡기라도 하면 그것을 눈 속에 묻어놓고 겨우내 몸보신을 하였다.

지금은 생태계보호법으로 야생동물을 잡지 못하지만 그 때는 그렇지 않았다.

이곳 설피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겨울이 가장 길고, 눈도 제일 많이 내리는 곳이라, 지금도 설피마을로 불리고 있다. 움막집과 너와집에서는 아궁이에 군불을 때고 그 숯불을 화로에 담아 감자와 멧돼지 고기를 구워서 온 가족이 등잔불빛 아래서 먹던 추억이 생각난다. 그때에는 장을 보러 가려면 눈덮인 산길로 하루품을 꼬박 들여 걸어가야 하는 먼 거리였는데 지금은 2차선 포장도로와 조침령 터널개통으로 양양이나 속초를 20여분이면 갈 수 있게 되었다.

해발 900m에 자리한 양양 양수발전소의 상부댐 저수지 주변도 겨울이면 하얀 눈을 두른 또 다른 절경을 연출한다.

수천년의 세월을 견뎌온 곰배령의 원시림과 아름다운 설경이 겨우내 어우러지는 설피마을의 겨울풍경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 눈에 띄는 변화라고 한다면 이제는 조침령을 넘어 동해바다로 가는 차량들이 종종 눈에 띄는 것이다. 어떤 이들이 그 속에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흰 눈 쌓인 조용한 산 속 마을길을 지나가는 자동차들마저도 동네사람들에게는 반가움의 대상들이다. 겨우내 하얀 눈꽃이 숲과 마을을 뒤덮고 있는 정겨운 설피마을에서 오래도록 살고 싶어지는 오늘이다.

이상우·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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