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춘
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
영국 노동당이 걸어온 길은 기구하다. 현재는 보수당과 쌍벽을 이루며 집권하고 있지만 1900년 창당 후 지금까지 108년 동안 정권을 담당했던 기간은 모두 30년에 불과하다. 그것도 2차대전 전까지의 집권은 3년뿐이고 종전 후에는 클레멘스 애틀리 총리(5년), 해롤드 윌슨 총리(8년), 제임스 갤러한 내각(3년), 그리고 1997년부터 지금까지 토니 블레어(10년), 고든 브라운 내각(1년)에 이르고 있다.

종전후 노동당이 가장 침체되고 어려웠던 시기는 인플레, 파운드 하락, 철강노조 등의 꼬리문 파업 등으로 1979년 M·대처 보수당 내각에 정권을 빼앗긴 이래 18년간이었다. 대처는 국민의 지지 속에 “영국병을 고치겠다”며 집권, 승승장구한 반면 급진좌파가 장악한 노동당은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주요산업의 국유화, 세금증세, 사회복지정책의 확대 등을 고수하여 총선 때마다 잇따라 패배했다. 당 지지율의 하락, 당원들의 사기 저하, 당의 내분 속에 마이클 풋, 닐 키녹, 존 스미스 당수가 차례로 교체됐다. 당의 해체론까지 제기되는 가운데 1997년 새 당수에 43세의 토니 블레어가 선출되면서 당에 지진이 일어났다. 블레어 당수는 당을 기사회생시키기 위해 당의 모든 것을 개혁하는 인적쇄신과 기본정책의 전환을 시도했다. 기득권을 누리던 많은 중진들을 퇴진시키고 젊고 참신한 각계의 인재들을 대거 영입하는 물갈이를 했다. 아울러 ‘새로운 영국을 위한 신노동당’이란 표어아래 전통적인 당 정책을 대수술했다. 산업 국유화 폐기, 증세의 유보 및 백지화, 사회보장 전면개혁 등 앤소니 기본스 교수 등이 내세운 제3의 길을 채택한 것이다. 이 같은 당의 전면개혁과 쇄신을 위해서는 뼈를 깎는 희생과 진통을 겪었다. 수개월동안 국민이 보는 가운데 좌우파간에 격렬한 논쟁을 거친 것이다. 당을 탈바꿈시킨 결과 그해 총선거에서 노동당은 419석을 얻는 압승을 거둬 18년 만에 다시 집권했다. 블레어 내각은 새 정책과 공약을 충실하게 실천해 지난 10년간 2차 대전 이후 최대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필자가 영국 노동당의 집권-총선연패-침체-대혁신-재집권의 과정을 길게 소개한 것은 유럽은 물론 세계 주요국 정당들에게 귀중한 전례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역대 집권당 중에서 오늘의 대통합민주신당은 실로 기구한 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유는 대선에서 승리한 민주당을 뛰쳐나와 열린우리당을 만들었고 “100년 가는 정당” 운운하다가 3년 만에 추락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집권당들과는 달리 여당이면서 변변한 여당으로서 구실도 못하고 대우도 받지 못한 채 집권자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탈당-이산 끝에 대통합민주신당으로 새 간판을 달았지만 엉성한 당 체제는 대통령선거에서의 패배를 몰고 왔다. 특히나 대선 사상 최대인 무려 531만표차 패배의 충격으로 당이 휘청거리고 있다. 기이한 것은 대패에 진정으로 책임지는 인사들은 별로 없고 네 탓 타령과 눈치보기만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 신당은 진통 끝에 내일 중앙위원회에서 교황선출방식으로 새 대표를 선출할 예정이다. 7일 중앙위에서 격론 끝에 일단 이같이 결정했지만 내분의 불씨는 여전하다. 신당은 이제 18대 총선을 3개월 앞두고 중대한 기로에 섰다. 누구를 당 대표로 뽑든 새 지도부는 당을 살리기 위해서는 영국 노동당 같은 대대적인 인적쇄신과 정책전환을 해야만 한다. 당연히 책임 있는 인사들은 기꺼이 용퇴해 물갈이를 도와야 할 것이다. 임시 봉합으로 열린우리당 이래의 비슷한 방법과 모습으로 총선에서 승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민은 신당이 과연 비상한 자기쇄신으로 건전하고 새로운 야당으로 변신할 것인지 지켜볼 것이다.

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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