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궁창성

편집부국장 겸 사회부장
참담했다. 불길에 갇힌 숭례문을 보며 밤새도록 침통했다. 화마에 쏟아져 내리는 숭례문의 처마와 기와를 지켜보며 추락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는 듯해 참담하고 침통했다. 숭례문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였다. 조선조 내내 외국 사신을 맞이하고 보내는 길목이었다. 왕의 밀명을 받아 지방으로 내려가는 암행어사는 숭례문 밖에서 비로소 밀지를 펴보고, 왕명과 잠행해야 할 행선지를 알 수 있었다. 외직으로 나가는 신임 지방관들은 숭례문 밖에서 친지, 친구들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청운의 뜻을 품고 충청, 전라, 경상 등 삼남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올라온 청년들은 숭례문에 들어서야 입신하고 양명할 수 있었다.

숭례문은 조선왕조실록에 모두 203번 등장한다. 태조에서 고종에 이르기 까지 꼭 500년 세월이다. 첫 기록은 태조 5년(1396년) 9월 24일자 실록이다.‘성 쌓는 역사를 마치고 정부(丁夫)들을 돌려 보냈다. 봄철에 쌓은 곳에 물이 솟아나서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석성으로 쌓고 간간이 토성을 쌓았다. 운제(雲梯)도 빗물로 인하여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다시 쌓고, 또 운제 1소(所)를 두어서 수세(水勢)를 나누게 했다. 석성으로 낮은 데가 있는 데는 더 쌓았다. 또 각 문의 월단누합(月團樓閤)을 지었다. 정북(正北)은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 하고,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했다.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하고,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칭했다.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고 적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숭례문이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첫 기록 이후 꼭 500년 뒤인 고종 33년(1896년) 9월 29일자 실록이다. 풍전등화, 백척간두에 서있던 격동과 혼란의 조선은 내부령(內部令) 포고 제9호를 통해 ‘황토현(黃土峴) 흥인문(興仁門)까지와 대광통교(大廣通橋)에서 숭례문(崇禮門)까지는 한 나라의 큰 도로인 만큼 집들이 도로를 침범하는 것과 내를 건너는 것은 법에 의하여 금해야 한다’며 ‘두 도로의 원래 너비가 혹 50여 척(尺)도 되고, 70~80척이 되는 곳도 많으니 현재의 상무(商務)에 비하면 필요한 도로의 너비보다 지나친 만큼 규정을 세우고 고쳐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숭례문은 조선왕조 500년, 그후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상징하는 기념비로 지난 612년 동안 우리의 곁을 지켜왔다. 하지만 이제 세로로 써 내려간 ‘숭례문(崇禮門)’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지난 세월 우리에게 자부심과 자긍심을 심어줬던 그 숭례문을 볼 수 없다. 문화재청과 서울시 중구청은 11일 날이 밝자마자 소실된 숭례문에 차단막을 치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들의 처참한 몰골과 치부를 가렸다. 진화에는 굼떴던 문화재청은 이날 오전 서둘러 복원계획을 밝혔다. “원형대로 복원하겠다”고, “2006년 제작한 정밀 실측도면을 기본으로 다시 짓겠다”고,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고 강변했다. 지난 2005년 4월 불길속에 녹아 내린 낙산사의 동종과 원통보전의 폐허 앞에서 이 땅의 관리들이 내뱉던 그 소리다.

폐허로 추락한 숭례문을 바라보며 역사유산을 지켜내지 못한 우리를 되돌아 본다. 다시한번 참담하고 비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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