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과소론에서 인구 적소론으로

이광식 논설실장
강원도의 인구가 줄어든다 하여 인구론을 다시 살펴본다. 고전파 경제학자 맬서스(Malthus)의 인구론은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 생산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맬서스는 잘못 짚었다.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지 않을 뿐더러 식량 생산이 밑바닥 성장률을 맴돌지도 않는다. 오히려 적지 않은 나라에서 출생률이 감소하는 추세다. 맬서스는 왜 틀렸는가? 그는 농업과 공업의 혁명적인 발달을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강원도에서도 맬서스의 인구론은 인정받지 못한다. 기하급수적으로 늘기는커녕 출생률 저하는 물론 인구 역외 유출로 강원도는 젊은이들이 드문 형국을 맞았다. 그러나 강원도 사회의 전반적 침체 현상이 오직 인구 감소 현상에서 비롯됐다는 식의 주장은 지나치다. 오히려 원인은 ‘아마 그럴 것’이라는 도민들이 갖는 일종의 패배주의에 있다고 본다.

한 마디로 경제적 조건에 알맞은 크기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적은 인구를 이르는 이른바 ‘과소인구(過少人口)’를 강원도의 침체 원인으로 꼽는 바로 이 관점이야말로 강원도 발전의 지체 현상을 부르는 패배주의라는 말이다.

과소인구 탓에 생산과 생활을 지탱하는 조건이 손상된 것은 분명하지만, 또 이런 현상을 중앙정부에 알리고 그 보완책을 주문하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그 대안을 스스로 찾아내지 않을 경우 상황이 더욱 악화되리란 점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Marx)의 인구론은 맬서스의 인구론과 다르다. 르크스의 ‘상대적 과잉인구론’은 그 지역의 사회 경제적 조건에 따라 인구수가 결정된다고 본다. 오늘의 강원도 인구 감소 현상을 이해하기엔 이쪽이 더 좋다.

그러나 일촌일품(一村一品)운동으로 성공한 일본 오이타현(縣)의 히라마스 모리히꼬(平松守彦) 지사는 이 인구 과소론적 생각들을 넘어 인구가 적은 듯하나 그게 오히려 딱 알맞다는 ‘인구 적소론(人口適少論)’을 주장한다. 예컨대 우리의 새마을운동이 농촌 인력의 자본화를 통해 빈곤을 벗어난 운동이었다면 일본의 일촌일품운동은 지역의 특산품을 통한 ‘인구의 지방 정착 운동’이었던 것이다.

맹자(孟子)도 같은 주장을 편다. “과인의 백성이 더 늘지 아니함이 무엇 때문입니까?” 하고 묻는 양혜왕에게 맹자가 되묻는다.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으로 비유하겠습니다. 싸우다가 어떤 자는 백 보, 어떤 자는 오십 보 달아났는데, 오십 보 달아난 자가 백 보 달아난 자를 비웃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왕왈 “옳지 않아요. 도망치기는 마찬가지지요.” 그리하여 맹자가 결론을 맺는다. “이걸 아신다면 왕께선 백성이 이웃 나라보다 많기를 바라지 마소서.”

인구 문제로만 보면 통치자가 전쟁을 좋아할 경우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도 인구가 늘지 않는다는 말이다. 패도정치를 버리고 왕도정치를 하라는 맹자의 비유의 말에서 지역 스스로 인구 늘리기에 노력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노자(老子)도 비슷한 말을 했다. ‘노자’에 나오는 소국과민(小國寡民)사상이 그것이다. “작은 나라에 적은 백성이 살아 수많은 도구가 있어도 사용하지 않게 하고…”로 시작되는 말로 노자는 이상국의 전형을 ‘작은 나라(小國), 적은 백성(寡民)’에서 찾는다.

결론을 맺자. 수도권 집중화 기현상을 극복하는 정책으로 강원도 인구 감소 현상을 막을 수 있으므로 이를 중앙정부에 강력히 요구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적은 인구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따위의 패배주의적 생각을 벗기만 하면 살기 좋은 강원도를 만들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인구 과소론’에 매몰된 부정적인 생각을 ‘인구 적소론’이란 긍정적 사고로 전환시킬 때 강원도가 새로운 기회를 잡게 되리란 논리다. 자기 결정력을 높이자는 얘기이니, 이 또한 주목할 만한 주장이 아닌가.

이광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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