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영춘

춘천성시화본부 사무총장(예광침례교회 담임목사)
“단순과 간소는 다른 말로 하면 침묵의 세계이다. 또한 텅 빈 공의 세계이다. 텅 빈 충만의 경지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이 단순과 간소함 안에 있다. 우리는 흔히 무엇이든지 넘치도록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 텅 비우려고는 하지 않는다. 텅 비워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텅 비어야 거기 새로운 것이 들어찬다. 우리는 비울 줄 모르고 가진 것에 집착한다. 텅 비어야 새것이 들어찬다.”

운보라는 화가의 수묵화를 설명하는 글들이다. 단순히 수묵화가 주는 그림의 멋과 아름다움만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마음 깊이 향기 되어 3월 냇가의 강아지풀이 봄바람을 부르듯 생각을 사로 잡는다.

동양철학에도 그 공과 허 속에 극락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도 이 비움과 텅빈 공의 세계 즉 가난함이 심령에 이뤄지면 그 속에 천국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 속에 영광을 누리는 복 있는 사람이 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몇 백 억 복권이 당첨되며, 좋은 집에 살고, 명문 대학에 합격되거나, 아름다운 외모로 자신을 뜯어 고쳐야지만 정말 행복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쉽게 잊어버리는 것인지. 사람들은 인생을 복잡하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인가. 사람들은 욕심과 야망을 채우려고 부딪치며 달려가기만 하는 건지…

성경은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고 했다. 죄가 장성하면 죽음을 낳는다고 했다. 요즘 올림픽을 압둔 중국의 티벳 무력 탄압이 신문 등 뉴스에 자주 오르내린다. 또 하나의 탐욕과 욕심에 의해 짓이겨지는 국제적인 아픔이다. 또 하나의 빈익빈 부익부의 가진 자의 횡포로 한 국가와 수많은 국민들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짓밟히는 아픔을 낳는다. 울분의 현장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선도, 정의도 없는 냉정한 반인륜적인 행위가 저질러지고 있다.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은 차곡차곡 준비 되어가는 아이러니를 우리들은 눈으로 지켜보고만 있다.

놀이터에 놀고 있는 힘없는 이웃의 여자 어린아이들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무참하게 성폭행한 일도 발생했다. 자신의 성욕구를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 들킬까 무섭다며 한아이 한 아이씩 목을 졸라 죽였다 한다. 사체를 토막 내고 어둔 밤 중 강물에 내던져 버리곤 모르는 척하는 이 사람을 인간의 탈을 쓴 동물이라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발생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저질러진 것에 대해서 분노한다. 인간들이 이웃처럼 살아가는 감각을 잃어버린 무감각의 시대적 아픔과 상처 앞에 우리는 할 말조차 잃어버리고 있다.

무언가 무조건 자신을 꽉꽉 채워야만 행복한 것인지 묻고싶다. 내 행복과 즐거움을 위해선 다른 행복과 권리는 무참히 희생되어도 괜찮은 것인가에 대해서도 묻고싶다. 날로 증가하는 무책임한 이혼들 때문에 청소년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상처 입은 영혼들은 또 다른 흉기가 되어 사회를 아프고 멍들게 하고 있다.

하늘은 푸름을 비우고 구름을 채워 봄에 단비를 흡족히 내리고 있다. 비움의 천국을 모르는 사람들은 인생을 채우는데 급급하여 진정한 천국을 잃어버리고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텅 빈 봄의 들녘 매섭게 달려오는 칼바람에도 이제 곧 새순이 돋고 색색의 꽃들로 채워진다. 찬란한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계절이 오겠지! 겸허한 순수한 마음, 비워진 심령들마다엔 겸손으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 십자가의 생기가 푸르고 맑은 생수처럼 돋아난다. 사람들의 공허한 마음속에 예수님의 은혜로 가득해지겠지. 아! 맑고 싱그러운 새봄의 향기가 가득한 언덕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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