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종 길

홍천 명덕초 교사
어제부터 오는 비는 미련이 남아서일까 오늘도 봄을 재촉하는 세우(細雨)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새 봄맞이 준비에 부산한 봄의 유혹에 못 이겨 서둘러 길을 나섰다. 하얗게 피어 오르는 안개 속으로 숨어버린 방죽 길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깨를 겯고 이어진 산과 들은 묵화속의 풍경처럼 자세를 낮추고 봄단장이 한창이다. 어디선가 들리는 봄의 소리. 봄의 향연이 시작된 것이다. 한 켜 더 재여진 풀빛과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는 간지러운 바람소리, 불청객의 발소리에 놀라 수면을 박차고 날아 오르는 오리들의 날갯짓, 무성함을 자랑하던 갈대는 허리가 꺾여 다음 주자에게 미련 없이 자리를 내어 주고 이름모를 들꽃들은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홍천 남면 양덕원의 봄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정겨운 풍경이다.

볼수록 정감이 넘치는 시골집 토담 너머로 길게 가지를 뻗은 목련은 꽃망울을 입에 물었다. 지고 없는 잎 대신 가지런히 앉아있는 참새 떼의 재잘거림을 듣고 있노라니 참새 내는 말이란 게 ‘짹’뿐이니 말 배우기 쉽고 글 배우기 쉽겠다고 한 어느 시인의 노래가 생각났다. 우리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으랴.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단순함의 여유를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 촌부들의 손길은 더 바빠진다. 어떤 어려움과 고통도 묵묵히 이겨내며 희망을 파종하는 사람들. 자연과 더불어 삶을 즐길줄 알고 물질의 풍요보다 자연의 품속에서 넉넉함을 배워가는 이들의 일상을 바라보노라면 봉숭아 꽃물보다 더 진한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

저녁 어스름이 번지는 방죽 저 편 강물 속에는 어느새 산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물위에 투영된 아름다운 잔영들이 물결따라 일렁인다. 내 마음도 강물도 하나 되어 어디론가 끝없이 흘러가고 있다. 어디선가 정태훈의 ‘떠나가는 배’ 그 애절한 선율이 은빛 편린을 타고 가슴을 적신다.

아- 양덕원의 봄. 그 봄의 신비함이 산과 들도 냇물도 내 마음까지도 모두 가져가 버리는 가 했더니 산사로 이어지는 오솔길 하나를 내어 주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오솔길로 발걸음을 재촉하다 잠시 멈추고 하늘을 본다. 가는 겨울이 아쉬워서인가 떼지어 몰려가는 기러기 떼와 물오른 나뭇가지 사이로 나는 산새들. 박새 몇 마리가 인사를 건네고 사라지면 겨우내 꺼칠해진 청설모가 내 앞길을 가로지른다.

산사 입구에는 백년은 됨직한 돌배나무가 봄을 맞고 있었다. 넉넉한 마음으로 팔을 벌려 세상의 미물을 다 껴안고 있는 인자한 자태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를 뒤로 하고 울창한 잣나무 숲길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양지바른 산자락 밑에 나지막한 암자 하나가 나를 반긴다. 청순하고 소박한 모습에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절집이다. 스님의 열정과 혼이 그대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물과 돌과, 나무와 불상과 탑들이 한데 어우러져 불평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대웅전 앞에 서니 잡다한 일상의 단상들이 일순간에 뇌리를 스친다. 내 영혼을 얼마나 갈고 닦아야 부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을까. 그것을 헤아리는 데는 오직 ‘지혜의 길’과 ‘자비의 길’ 밖에 없다고 한 법정 스님의 잠언이 번득인다. 덧없는 번민도 부질없는 욕심도 모두 벗어버리고 세월 속에 켜켜이 쌓아둔 내 영혼의 빛바랜 흔적들을 씻어 내리라. 산사에 내리는 봄비가 더 굵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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