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빈 강릉 아산병원 정신과장

▲ 백상빈 강릉 아산병원 정신과장
미국의 분노 연구자인 어니스트 교수는 미시간주의 시골마을 주민 수백명을 대상으로 부부사이의 분노표현과 수명과의 관계에 대해 1971년부터 장기간의 추적연구를 해왔는데, 그 결과가 흥미롭다. 두 사람 모두 분노를 억제해온 부부들의 경우, 그렇지 않은 부부들에 비해 부부모두 숨진 비율이 4배나 높게 나온 것이다. 또한 분노가 억압되었을 때 이를 곰곰이 되씹는 경향은 여성일수록 더 자주 더 강하게 나타났고 지속시간도 남성보다 길어 더 심각한 심리적 갈등을 초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분노의 억압이 수명에 치명적인 경우는 여성보다 남성이 더 높게 나왔다. 즉 남성은 화를 잘 내지만 오래가지 않으며, 분노를 억압할 경우 수명이 현저히 감소하는 특징이 있고, 여성은 화를 남성보다는 덜 내지만 오래가는 경향이 있으며, 분노를 억압할 경우의 수명단축이 남성보다는 적다는 것이다. 이 연구에 따르자면 무조건 화를 참는 것은 곧 자기생명을 깎아먹는 현명하지 못한 처신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분노를 외부로 표현하는 것이 장수의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감정적으로 화가 치솟기 이전에 입으로 상대방에게 “내가 지금 화가 나려고 해”라고 말해버리는 것이다.

정신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에게 발생한 분노는 결코 저절로 해소되지 않으며 세 가지 방향으로 흐르며 자발적으로 해소를 도모하게 된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방향으로 타인에게 분노의 화살을 모두 돌리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화나는 일이 있으면 무조건 남의 탓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이 사람들은 자기 잘못은 조금도 없고 모두 환경이나 타인이 잘못해서 자신에게 불행해진다고 생각하는 사고패턴으로 일관한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를 투사, 합리화의 방어기제라고 부르고 있다. 이 사람들의 분노해결 방법은 가장 미성숙한 것이기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분노해소의 효과가 가장 뛰어나다. 두 번째의 방향은 분노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로 모두 돌리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에게만 항상 화를 내는 사람들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이들은 모든 불행이 다 나의 불찰로 인해, 내가 못났기 때문에 벌어진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마치 ‘내 탓이요’ 운동을 연상케 하는 책임감 있고 성숙한 어른의 사고에 가깝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사고패턴으로 일관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세 번째 방향은 좀 특이하다. 앞서의 두 가지 방향으로 분노를 해결할 수 없을 경우에 생기게 되는 절충안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일관하기에는 양심이 찔리고, 그렇다고 내 탓으로 일관하자니 이건 좀 자존심이 상한다. 그러다 보니 분노는 쌓이는데 해소를 위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때 발생하는 것이 바로 신체증상이다. 즉 몸이 아프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픈 곳도 여러 군데인데, 가장 흔한 두통에서부터 시작하여 목, 등, 팔다리 할 것 없이 몸의 모든 부위가 아플 수 있다. 이런 증상으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면 결과가 전부 정상으로 나온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곳이 바로 신경정신과이다. 이런 분들은 대개 ‘신경증’으로 설명을 듣게 된다.

이러한 분노해소의 세 가지 방향은 물론 실제 생활에서는 칼로 자르듯이 정확히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며 세 가지가 모두 함께 섞여 공존하게 된다. 하지만 그중에서 어떤 방향을 주로 취하고 있는지는 사람마다 분명 차이가 있다. 심리적 건강과 도덕적 만족의 균형을 지켜나가기 위해, 그동안 나는 과연 어떤 방향을 선호해 왔는지 이제는 한번쯤 뒤돌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