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낡은 지식이 됐을지 모르나 새삼 다시 끌어내 말하자면,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932, 36, 40, 44년 무려 12 년간 대통령을 역임한 4선(四選) 대통령 프랭크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는 2차세계대전 직전 전임 대통령 때의 경제 공항에서 이른바 뉴딜정책으로 국력의 전성기를 이끌어낸 영웅적 대통령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견해에 따라 전혀 달리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여간 일단 그러하다.

그와 관련된 일화가 여럿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중국 국민당 정부 장개석 총통의 부인 송미령이 백악관을 방문하여 루즈벨트를 만나고 나오면서 별 생각 없이 “일어나지 마시고 그냥 앉아 계십시오.” 하고 말하자, 루즈벨트는 “일어나고 싶어도 못 일어납니다.”라고 조크하여 한순간 썰렁해진 분위기를 눅였다는 이야기이다. 알다시피 루즈벨트 대통령은 소아마비 장애인이었으므로 항상 휠체어에 앉아 있던 사람이다.

우리가 이 시간 지난 세대의 인물, 그것도 한국인이 아닌 미국의 루즈벨트를 거론하는 까닭은 그가 비장애인이 아니었음에도 무려 네 번씩이나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임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18대 총선이 끝났다. 다양한 경력을 소유한 후보들이 다양한 모양새로 혹은 당선되고 혹은 탈락했다. 유명한 인물이 고배를 마신 경우도 있고, 예기치 않은 인물이 당선돼 갑자기 조명받기도 한다.

이들 중 우리의 관심은 다선(多選) 의원들이다. 루즈벨트 정도는 아니지만 정치적 역량이 있거나 지역에서 특별히 지지받아 거듭 당선된 인물에 축하를 보내고 싶다. 국회의 경우 우리나 미국이나 다선 위주의 구도로 짜여지고, 무게 중심이 다선 의원 쪽으로 기우는 현실이므로, 의미를 더 확장해 말하자면, 다선 의원을 선택하는 것이 지역 이익에 부합된다는 점에서 도출신 다선 국회의원의 특별한 의미와 필요성이 이해된다.

자, 이제 국회의원은 기왕에 그렇다 치고, 자치단체장에게 다선이란 과연 무엇인지 한 번 물어 보자. 옛날에 어느 지역의 현감이 지역을 잘 다스린 뒤 임기가 다하여 다른 지역으로 이임됐다. 그러자 전(前) 지역 사람들이 자기네 지역으로 그 현감을 다시 보내주길 요청했고, 그리하여 다시 돌아와 재임했는데, 그때부터 그 현감은 선정을 베풀던 지난번과는 완전히 달라져 가렴주구하기를 마다 않더라는 것이다. 실제로 있었던 얘기다.

하나의 예를 일반화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에서 하나의 개연성을 얻는다. 즉, 재선 혹은 3선을 이룬 단체장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갖게 된다고. 이를 테면 여러 번 같은 자리에 앉다 보면 그동안의 관록이 오히려 긴장을 풀게 만든다는 것, 경륜이 되레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점, 초기의 열정 의지 신념도 색이 바래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게 본디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

루즈벨트에게도 네 번이나 대통령을 하는 중에 어느덧 포퓰리즘과 부패에 물들었으며, 미국 경제의 부활도 뉴딜정책보다는 전쟁 특수로 인한 게 더 컸다는 비판이 따라 다닌다. 루즈벨트는 3선 이후 전쟁 막바지에 4선에 이르렀고, 4선 당선 뒤 병사했다. 그 후 1947년에 미국은 성찰하여 ‘대통령의 3선 금지’를 성문화했으며, 지금도 10 년 이상 대통령을 못하도록 하고 있다.

4·9 총선에서 4선 3선 2선 된 도내 국회의원들이 적지 않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다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댓구인 동양의 그 ‘권불십년(權不十年)’이 미국서 실현된 것에 새삼 고소(苦笑)하다가,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자치단체장의 다선을 떠올리다가-, 시인 도연명이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동쪽 울타리 밑에 국화를 따며,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네)”이라고 읊었듯이 그저 조용히 ‘봉의산’을 바라본다.  이광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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