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는 박정희 정부가 조국의 근대화를 이룩하기 이해 가난 극복과 함께 경제를 일으키는데 총력을 기울였던 시기다. 박 대통령은 1964년 초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근 15년 동안 수백 회에 걸쳐 각종 회의를 주재했지만 가장 중요시하고 심혈을 기울였던 회의는 매월 한 차례 씩 열었던 수출진흥 확대회의와 당정협력 확대회의였다. 뒤의 회의는 당정의 수뇌들이 모여 정부의 주요시책을 설명하고 당의 의견을 듣거나, 당에서 새로운 국책사업과 정책을 건의하고 정부가 이를 평가하는 자리였다. 한마디로 모든 분야의 주요국정과제와 사안을 당정이 협의했다. 정부 측에서는 총리, 장관, 국책기관장, 관계 고위실무자들이 당에서는 당의장을 비롯 사무총장 등 당직자, 국회상임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해외순방에 나가지 않는 한 매월 두가지 회의를 자신이 직접 주재했다. 당정확대회의에서는 국책과 현안을 놓고 장관과 여당 간부가 논전·설전을 벌이거나 일개 과장이 당의 건의를 조목조목 비판, 지적하는 일이 종종 빚어졌다.

박 대통령은 당정 간 논쟁에 줄 곧 침묵을 지키다가 회의 막바지에 결론을 내렸고 이것이 곧 정부의 방침이 됐다. 다음날부터 행정부는 시행준비에 착수했으며 당은 모든 의원들에게 알리면 의원들은 국회에서는 대야당 설득에 나서고 지역구에 내려가 주민들에게 내용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이러한 당정협력은 정부가 수출증진을 통한 경제발전과 민생을 안정시키는데 결정적인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런데 당정협력이 결정적으로 실패한 경우가 있었다. 1977~78년 정부는 농민과 여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쌀 증산을 내세우며 노풍볍씨를 권장하고 역시 많은 국민과 중소상공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준비없이 부가세법을 실시했다가 1978년 12월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이 제1야당인 신민당에게 총유효 득표율에서 1.1%로 패배한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당정협력체제는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부로 이어지면서 내각과 청와대의 우위, 여당무시의 분위기로 축소되다가 노무현 정부 때는 당정분리라는 명분아래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한마디로 여당과 협조를 꺼리고 야당과는 대화와 상생을 기피하거니 국정운영이 표류하거나 비틀거리게 된 것이다. 지난주 정부와 한나라당은 새정부 출범 후 본격적인 당정정책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여당은 “정부가 혁신도시 전면재검토 등을 흘리는 등 일방통행식으로 하려 한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정부에 끌려 다니거나 들러리가 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날 정부는 “경기가 하강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747공약은 크게 수정해야 할 것 같다”며 조속한 경기부양을 위해 추경예산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정부는 경제가 위기분위기라며 경기부양-추경편성을 강조한 데 대해 당정책위의장은 “위기가 아니다”라고 엇갈린 평가를 내린 것이다. 당정 간의 논쟁, 정책논쟁은 뜨거울 수록 좋다. 오랜만에 가진 당정회의라서인지 정부와 여당은 회의 후에도 서로가 경제현실을 잘못보고 있다고 꼬집어 눈길을 모았다. 작년 이래 유가·원자재가·식량가 등이 계속 올라 경제성장, 일자리 창출, 소득증가 등 모두가 쉽지 않은 상황임에 틀림없다.

이런 정도로 나라안팎의 경제사정 등이 심각한 만큼 당정은 총리 등 전 각료와 당대표 등 모든 당직자가 회동하는 정례당정회의는 매달 1~2차례, 경제각료와 당정책위 의장·국회경제위원장들 간의 회의는 매주 갖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당정 간에는 어떤 현안과 과제를 놓고 긴밀한 각급대화·협의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대통령과 당대표·원내대표 등의 회동도 하루 빨리 정례화시켜야 한다. 당정의 건실하고 효율적인 협력은 이명박 정부의 성패와 직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춘 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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