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춘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후 제헌국회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제정한 법률은 반민족행위처벌법이었다. 9월 7일 본회의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시켰고 정부는 22일 각의 의결을 거쳐 공포했다.

반민특위는 10인의 특별조사위를 구성하고 특별검사부·재판부를 설치한 후 1946년 1월 7일부터 활동에 들어갔다. 사무실은 처음에는 중앙청에 두었다가 1월말 서울 을지로 상공부 통계국 건물(현 국민은행 본점)로 이전했다.

반민특위는 일제에 협력한 기업인 박흥식을 시작으로 독립지사를 체포·사형·복역케 한 특고경찰·기업인·종교인·문화인 등을 줄줄이 연행 구속했다. 전 국민의 성원 속에 친일파 색출·처벌에 열중하던 반민특위는 뜻밖에 암초를 만났다. 이 대통령이 불법행위라는 이유로 6월 6일 경찰을 보내 특위를 제압한 것이다. 사실상 특위를 무력화시킨 것. 이를 계기로 특위는 약화를 거듭하다가 1951년 3월 해체·폐지되고 말았다. 특위는 그동안 688명을 취급, 그중 599명을 검찰에 송치한 결과 여러 명이 사형 등 유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기구약화와 함께 나중에 모두 풀려났다.

만일 이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지 않고 친일파 색출·처벌 작업을 엄정하게 벌였다면 친일·부일협력자 문제는 일찍이 처벌·정리되어 지금까지 민족의 찌꺼기로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개탄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가 지난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대상자 4776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지난 2005년 8월에 밝힌 1차 명단 외에 안익태, 이원수, 최승희, 조두남, 서범석, 신현확 등 1760명을 추가한 것이다.

60년 전 반민특위에 의한 친일행적에 대해 규명, 심판, 엄벌, 엄단은 실패했지만 뒤늦게나마 사실을 규명해 기록으로 남겨 후대의 교훈으로 삼는다는 뜻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와 동편찬위는 법에 의한 기구가 아니라 순수 민간기구다. 그들이 지난 오랜 기간 동안 친일행위규명에 진력해 온 것은 결코 과소 평가하는 것이 아니지만 일단 친일인사로 사전에 등재되면 그것은 곧 민족과 역사에 죄인으로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신중함과 정확성이 우선 전제돼야 한다. 어느 정도 범위까지를 친일·부일행위로 봐야 할 것이며 강도는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등이 숙제다. 그것은 일찍이 국민이 전적으로 합의했던 반민특법에서 규정(1~7조)한 악질적인 반민복 반국권 반매국 반인륜적인 행위를 기준으로 삼는 게 적절하고 타당하다.

일제 때 관 또는 각 기관의 단순한 말단관리로 재직했었다고 ‘친일분자’로 지탄·기록하는 것은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혹시나 잘못된 기록 등으로 누명·오명을 쓰게 되는 일 또한 없도록 해야 한다.

친일파 규명과 친일행정의 청산은 온국민이 시간을 두고 엄정하게 가려내야 할 과제다.

이성춘 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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