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동헌 소설가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눈앞에 성년의 날이 닥치고 보니 아들 생각이 난다. 아들이 성년이 되었을 때, 녀석은 일병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나는 몇 차례 면회를 갔지만, ‘너도 이제 성년이 됐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이 나라에서는 아직도 군대에서 무사히 전역하기 위해 조심해야 할 일들이 많은 탓에 그저 ‘무사 전역’하는 방법만을 전하는 데 급급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무사히 전역하는 노하우를 꿰뚫고 있었다.

아들 자랑이 아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다 똑똑하다. 다 똑똑하지만 그 똑똑함을 힘든 일 비켜가는 데 활용하고, 좋은 회사 취직하는 데 활용한다. 그 좋은 회사란 연봉 높은 곳이며, 남들보다 일 적게 하는 곳이다.

그 젊은이들을 보면서 내 젊은 시절을 떠올리면 차차차가 떠오른다. 여기서의 차차차는 3CHA(Chance Challenge Change)를 뜻한다. 비틀어 얘기하자. 한국전쟁이 휴전된 이후에 태어나 196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 세대는 성년이 된 후 찬스를 잡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가만히 앉아서 찬스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책상 앞에 앉아 인터넷으로 구인 광고를 검색하고, 자신을 써주지 않는 사회를 원망한다. 자신이 취직하고 싶은 회사의 사장실에 찾아가지 못하는가. 적어도 나는, 그러지 않았다.

도전, 말은 쉽다. 하지만 정작 도전에 나서는 젊은이들의 비율은 옛날보다 오히려 낮다. 지금 당장 연봉을 계산하기 앞서 미래가 얼마나 밝은가를 가늠하는 젊은이들이 의외로 적다. 제자들 몇에게 취직 자리를 소개해 주려 나선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첫마디가 이런 거였다. 연봉은요, 주 5일제인가요, 회사는 우리 집에서 먼가요? 그 뒤로 나는 신입 사원을 소개하는 자리에 좀 쭈뼛거린다. 생각해 보자. 위험이 커야 이득이 큰 법이다. 이루어야 할 목표가 높으면 지금 약간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게 세상 이치다. 아들의 친구와 후배들아, 안 그런가. 그대들이 도전한 목록을 호명해 보라. 아마도,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 몇 없을 것이다.

변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아침형 인간>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을 때 나는 가는 곳마다 짜증을 냈다. 내가 반드시 아침에 일어나 글을 써야 한단 말인가. 내게 있어 그것은 절필보다 심한 고역이다. 덕목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유능한 일꾼이 되는 것, 그런 모든 것은 언제 잠에서 깨어나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깨어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생각을 어떻게 옮기느냐의 문제이다. 새벽에 글을 쓰는 소설가가 있고, 깊은 밤에 글을 쓰는 작가가 있는 이치를 생각해 보라. 그러나 <아침형 인간>이 베스트셀러가 되자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야 성공한다는 강박에 시달려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아침형 인간>에 담긴 상징을 못 읽은 것이다.

변화는 자신의 몸에 맞게, 정신에 맞게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성년을 맞는 젊은이들이여, 내가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는가를 골똘히 생각해 본 적 있는가. 김연아를 좇아 피겨 스케이팅을 배워야 하는가, 박지성을 좇아 축구를 배워야 하는가. 미안하지만, 아니다. 미안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창의다. 발전기의 용량을 늘리는 것이 변화가 아니라 발전된 전기를 효과적으로 배분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것이 변화다. 전봇대를 뽑는 것이 변화가 아니다. 전봇대를 뽑아야 하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미래형 도로를 설계하는 것이 변화다.

아들아, 아들의 친구와 후배들아! 이제 차차차를 외쳐라. 그 차차차에는 아파트 경비원이 경찰복과 비슷한 복장을 하는 권위를 해체하는 것이 포함되며, 경로석에 앉은 노인들이 목청 높여 떠드는 무례를 바꾸는 것도 포함되며, 형사는 회전의자에 앉고 피의자는 철제 접의자에 앉는 것을 바꾸는 것도 포함된다. 그 모든 것이 그대들이 꾸려나갈 세상을 만드는 기회와 도전과 변화의 틀이 된다. 왜 주저하는가. 이 땅은 우리 기성세대들이 잠시 빌려 쓰고 있을 뿐, 세상은 그대들 몫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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